항목 ID | GC069003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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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抗日義兵運動 |
영어공식명칭 | Anti-Japanese Righteous Army Movement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양훈도 |
[정의]
1907년부터 국권 회복을 위해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 전개한 항일 무장 투쟁.
[개설]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계기로 시흥 지역을 포함한 경기도 서부 지역의 의병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의병들은 일제의 탄압 기구인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진회원(一進會員)을 위시한 친일파를 처단하였으며, 부자들의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마련하였다. 1909년까지 소규모 유격전 형태로 활동한 의병들은 1909년 9월부터 시작된 일제의 남한 대토벌(南韓大討伐)에 쫒겨 결국 간도(間島)와 연해주(沿海州)로 옮겨갔다.
[역사적 배경]
1895년 일본의 명성왕후(明聖王后) 시해 사건 이후 전국 각처에서 위정척사(衛正斥邪)를 내세우고 의병 운동이 일어났다. 을미 의병(乙未義兵)은 민족의 기개를 드러내면서 용감히 싸웠으나, 화력 면에서 막강한 일본 군대를 당해 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고 조선 사회를 식민지로 재편하는 조치를 계속 강행해 나갔다. 또한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로 체결하고 외교권을 박탈한 데 이어,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강제 해산을 당한 군인이 의병 대열에 합세하면서 의병 운동은 다시 활발해졌다. 을미 의병은 주로 양반 유생이 중심이었으나, 군대 해산 이후의 의병은 군인·평민·몰락 양반 출신이 중심이었다.
[경과]
1907년 중반까지 시흥 지역을 포함한 경기 서부 지역에서는 의병 활동이 활성화되지 않았다. 전국 13도 의병 통합군인 13도 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가 설치되고, 의병이 집결하여 서울 진공이 논의되기 시작한 1907년 8월 이후 비로소 경기 서부 지역에서도 활발한 의병 운동이 전개되었다. 1907년 10월 11일 의병 20여 명이 안산군 초산면 논곡리[지금의 시흥시 목감동]에 돌입해 일본인 교사와 약재상 등 2명을 포박해 끌고 갔다. 의병들은 인질로 잡은 일본인들을 거액의 몸값을 받고 풀어주었다. 습격 당시 의병들은 민가에서 엽총과 육혈포 등 총포류도 가져갔다.
의병들은 1907년 11월과 12월에는 안산 관아(官衙)를 습격해 안산군수에게 부자들의 명단과 군기를 내놓으라고 위협하였다. 의병들은 또 순사 4명이 배치된 경기경무서 안산분파소를 기습해 안산분파소를 파괴하고 총기를 빼앗았다. 의병 활동의 주요 대상은 일본인과 일진회 회원을 비롯한 친일파, 일본 식민지 정책 수행 행정기관과 탄압 기구 및 담당자였다. 특히 분파소, 순사 주재소, 헌병 분견소 등이 주된 공격 대상이었다. 일제 치안 기구와 군대는 의병을 진압하고 반일 조선인을 탄압하는 일제 식민지 정책의 물리적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의병들은 친일 부호의 집을 습격해 군자금을 요구하고, 일제의 말단 행정 기구인 면장과 이장도 노렸다. 당시 민중들은 면장과 이장을 지방세 납부 고지와 수납을 담당하는 일제의 대리인으로 간주하였다. 의병들에게는 식민지 재정으로 쓰이는 세금을 회수해 국권 회복 운동에 쓴다는 명분이 있었다. 세금 수납을 담당하는 우편 취급소도 의병들의 주요한 공격 대상이었다.
의병들이 1909년 4월 안산군 임화면 능곡리[지금의 시흥시 능곡동] 이장(里長) 이봉구(李鳳求)의 집에 들어가 1원 93전을 빼앗았다. 의병들은 1907년 7월부터 1908년 5월 사이 경기도에서만 일진회원 9,260명을 사살했고, 140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가옥 360호를 불태웠다. 일진회는 일본 군대와 헌병대의 보호 감독 아래 전국 마을 단위로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하고, 전국적인 자위단 망 구축을 독려하였다.
의병과 일본군 사이의 교전도 빈번하였다. 1907년 10월에는 안산 파견 일본 수비대 척후병과 의병 20명이 2시간여 교전을 벌여 의병14명이 부상당했다. 의병들의 유격전이 계속되면서 의병을 색출한다는 구실로 일제 군경에 의해 의병과 무관한 지역민들이 무고한 희생을 당하였다.
[결과]
경기 서부 지역 의병들의 무장 상태는 빈약하였다. 구식 총과 칼이 고작이었다. 의병들은 빈약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유격전을 계속해 나갔다. 1907년 12월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13도 의병 통합군이 서울 진공 작전을 벌여 동대문 밖 30리[약 12㎞] 지점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공격과 의병 지휘 진영의 혼선으로 13도 창의대진소는 해체되고 의병들은 각자 독자 활동을 벌였다.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 의사와 전명운(田明雲) 의사가 친일 미국인 고문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1908)를 사살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항일 기운이 고조되어 의병 활동도 다시 한번 힘을 얻었다. 1908년 말 경기도 의병이 연합 활동을 모색하였다.
일제는 의병 활동이 자신들의 식민지화에 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여 1909년 9월부터 약 2개월 동안 군대와 경찰을 대거 동원하여 남한 대토벌이라는 총공세를 펼쳤다. 남한 대토벌로 의병 활동은 큰 타격을 입었다. 1910년 들어 의병 운동은 위축되어 국내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의병들은 한반도를 넘어 간도와 연해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의의와 평가]
항일 의병 운동은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난 민족 의지의 표출이었다. 조선 사회가 식민지로 빠르게 재편되는 현실에 맞서 의병들은 민중적 항쟁을 벌였다. 항일 의병 운동은 안으로는 병폐가 누적된 봉건적 내부 모순과 밖으로는 나라를 빼앗으려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일어선 반봉건 반제국주의 운동의 성격을 띠었다.
시흥 지역을 포함한 경기 서부 지역에서도 의병들은 1907년 8월부터 군자금 모집, 무기 확보를 위한 투쟁을 벌여 나갔다. 무장력이 빈약했음에도 대범하게 일제 탄압 기구를 습격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유격전을 시도하였다. 항일 의병 운동이 식민지화를 저지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식민지 지배 정책의 수행에는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