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9003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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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運動 |
영어공식명칭 |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
이칭/별칭 | 시흥 지역 3.1운동,수암면 3.1운동,군자면 3.1운동,구 장터 만세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시흥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병권 |
[정의]
1919년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개설]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이 경기도 시흥 지역으로 전해져, 1919년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까지 일제에 맞서 지역민들이 향촌의 전통 리 조직을 통해 일제의 무단 통치(武斷政治)를 반대하며 하부 통치 기구인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로 몰려가 독립운동을 벌였다.
[역사적 배경]
소래산·대부도의 대몽 항쟁(對蒙抗爭)과 하우명(河友明)·이상기(李相夔)로 대표되는 충효 사상을 기반으로 시흥 지역의 사류(士類)들이 강희맹(姜希孟) 이후 경학(經學) 중심의 학문에서 경세치용(經世致用) 양명학(陽明學)이 발전하였다. 1797년(정조 21) 8월 정조 행차로 권농사(勸農使)를 조직하는 등 시흥 지역민은 당대 문화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이들은 구한말(舊韓末) 일제 침략의 위기를 맞아 인천과 서해안 등지에서 항일 의병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당시 안산군의 장시(場市)인 석곡산대장(石谷山垈場)에서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고 단발령(斷髮令)이 시행되자 1896년 안산군민들이 봉기하여 정부의 친일적 행태를 성토하는 큰 규모의 민중 집회를 열었다. 또한 민족주의자들은 안산군 초산면 목암리 등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과 민족 교육운동을 전개하면서 인천부 황등천면과 안산군 와리 반촌 등에서 사립학교를 활발하게 설립하였다. 전통 서당도 민족 교육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일제의 식민지가 된 가운데, 토지 조사 사업 등 경제적 침탈을 당하면서 봉건적 잔재인 지주 소작제(地主小作制)가 식민지 지주제로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93%에 달하던 시흥군 수암면의 농민들의 생활은 매우 곤궁하였다. 시흥군 군자면의 주민 다수도 농민이었으며, 60% 이상이 서울 등지에 거주하는 지주의 땅을 경작하는 소작인이었다. 더욱이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간척지 개간과 전통 염업인 전오염(煎熬鹽)이 일제강점기 각종 부역과 조선 염에 대한 수세(收稅)로 이어져 주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의 말단에는 수암면사무소와 군자면사무소 그리고 수암경찰관주재소와 거모경찰관주재소가 있었다.
[경과]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의 군·읍·면 소재지와 리·동 등지로 퍼졌다.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이 절정이었다. 특히 시흥 지역에서는 23회의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7일 영등포에서 보통학교 학생이 만세 시위 후 동맹 휴학을 결의한 이래 4월 말까지 연인원 1만여 명이 참여하였다.
3월 30일 수암면 비석거리[현재 안산시 수암동]에서 수암면 18개 리의 주민 약 2천여 명이 윤병소(尹秉昭), 홍순칠(洪淳七), 유익수(柳益秀), 윤동욱(尹東旭), 김병권(金秉權), 이봉문(李奉文) 등의 주도로 수암경찰관주재소[지금의 안산시 수암동 478-1]의 부근에 모여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군자면에서는 3월 29일 장곡리와 3월 31일 선부리의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4월 3일 격문이 각 리·동에 배포되고 첩지를 입수한 일본 경찰이 영등포경찰서로부터 무장하여 파견된 가운데 4월 4일 군자면 거모리의 면사무소[지금의 시흥시 거모동 군자초등학교]와 군자경찰관주재소[지금의 시흥시 거모동 군자파출소]에서 강은식(姜殷植)과 김천복(金千福)이 수백 명의 군중들과 독립 만세를 외쳤다. 4월 5일에는 장현리의 서당생도 권희(權憘)가 ‘비밀통고(秘密通告)’인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집필하였으며, 장곡리 장수산(張壽山)이 구장(區長) 이덕증(李德增)에게 전하여 ‘4월 7일 구 시장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칠테니 집합하라.’고 모의하다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결과]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말까지 만세운동 현황을 보면 경기도 내 25개 지역에서 303회 발생하였다. 참가 인원 6만 8100명, 사망자 1,469명, 부상자 2,677명, 체포 4,220명이었고 시흥군에서는 37명이 투옥되었다. 4월 5일 독립운동 주동자 일제 검거 때 수암면 3.1운동을 주도한 유익수·윤병소·홍순칠·윤동욱·김병권·이봉문 등이 체포되었고, 군자면에서도 4월 4일 시위를 주도한 강은식·김천복과 4월 6일에 구 장터 만세운동을 모의한 권희·장수산 등이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매질을 당했다. 이들 중 주도자들은 경성지방법원에 보안법 위반으로 회부되어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징역형과 태형 등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시흥 지역의 3.1운동은 한말 의병 항쟁과 애국 계몽운동을 잇는 민족 독립운동으로 '애국(愛國)·애족(愛族)·애향(愛鄕)'이라는 시흥 정신의 표상이다. 2015년 3월 1일 시흥 지역 만세운동에 참가한 선현들을 기리기 위해 군자초등학교에 '시흥시 삼일독립운동 기념비'를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