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772 |
---|---|
한자 | 無學大師-墓-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 |
집필자 | 박종익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6년 12월 27일 - 서산군 부석면 창리에서 김창학[남, 79]으로부터 채록 |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1년 - 『서산민속지』하 수록 |
관련 지명 | 간월도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
채록지 | 서산군 부석면 창리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 |
성격 | 전설|풍수담 |
주요 등장 인물 | 무학대사|유씨 |
모티프 유형 | 명당 탐색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창리에서 무학대사(無學大師)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무학대사가 잡아준 묫자리」는 무학대사가 잡아 준 자리에 묘를 썼음에도 일가가 몰락하였다는 내용의 풍수담이다.
[채록/수집 상황]
1991년 서산문화원에서 간행한 『서산민속지』 하의 184~185쪽에 수록되어 있다. 이는 최운식·김창진 등이 1986년 12월 27일 충청남도 서산군 부석면 창리[현 서산시 부석면 창리]로 현지 조사를 나가 주민 김창학[남, 79]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내용]
한때 무학대사가 간월도에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무학대사는 지리가 밝은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부석면에 사는 유씨가 그 말을 듣고 무학대사를 찾아가 묫자리를 잡아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다음날에 오면 함께 가서 잡아 주겠다고 하였다. 유씨가 길을 나서려는데 그날 따라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마치 수숫대 같이 굵게 퍼부어 무학대사를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유씨는 무학대사를 찾아가는 것을 잠시 미루었다.
다음날 비가 그치자 유씨는 서둘러 무학대사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어제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못 왔습니다. 오늘 가시지요?”
라고 하였다. 무학대사는 유씨의 말을 듣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어느 만큼 가다가 짚고 가던 지팡이로 가리키며,
“저기 저만큼 나 이르는 대로 묘를 써라. 나는 갈 것 없다.”
고 하였다. 대사는 지팡이로 위치를 알려 준 뒤 바로 돌아서서 가버렸다.
유씨는 대사가 알려 준 자리에 조상의 묘를 섰다. 그러나 묘를 쓴 뒤에 가세가 기울어 망하고 말았다. 묘에 세워 놓은 비석이나 상석 또한 모두 쓰러지는 등 못쓰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유씨가 성의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 비가 오더라도 대사가 일러 준 날에 찾아갔으면 그와 같은 몰락의 비운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다.
[모티프 분석]
「무학대사가 잡아 준 묫자리」의 주요 모티프는 명당 탐색이다. 「무학대사가 잡아 준 묫자리」의 등장인물인 유씨가 명당자리에 조상의 묘를 쓰기 위하여 무학대사에게 간청하였으나 대사가 성의 없이 장소를 알려줘 유씨가 몰락하였다는 내용이다. 아울러 이처럼 무학대사가 성의 없이 장소를 지정해 준 이유는 유씨가 약속을 지키기 않았기 때문이라는 민중의 해석도 있다. 이밖에도 서산시에서 무학대사와 관련하여 전승되고 있는 이야기로는 「무학대사와 간월도 무당사」, 「토끼섬과 무학대사」, 「학이 날개로 보호한 어린아이」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