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12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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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美邑城西門-殉敎地 |
영어의미역 | Seosan Diocese of Cheondo-gyo |
분야 | 종교/기독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성태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986년 8월 29일 - 서산성당으로 옮겨 갔던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을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으면서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가 기념되기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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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건립 시기/일시 | 1989년 6월 24일 - 순교 현양비 제막 |
현 소재지 |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읍내리 274-10] |
성격 | 유적|처형장|순교지 |
관련 인물 | 윤종관 가별|무명 순교자 |
면적 | 약 240㎡ |
소유자 | 천주교 대전교구 |
관리자 | 해미순교성지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개항기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
[개설]
정분문(靜氛門)이라 불렸던 서산 해미읍성(瑞山海美邑城) 서문은 순교자들의 생사를 가르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성안의 옥에 수감된 천주교인들 가운데 형이 확정된 사람은 서문 밖으로 끌려 나와 처형되었다. 그러니 서문 밖 일대는 ‘사학죄인(邪學罪人)’들의 공식 처형장인 셈이었다. 매질이나 교수 혹은 참수로 사형이 집행되기도 하였고, 곡식을 타작하듯 메어치는 자리개질로 처형하던 돌다리도 있었다.
[건립 경위]
천주교 박해 당시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 밖 일대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가장 두려운 장소였다. 순교의 피로 얼룩진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 밖 일대는 세대가 지나면서 순교자의 열정을 기념하는 성지로 변화되었다. 1956년 유물 보존을 위해 서산성당으로 옮겨 갔던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을 1986년 8월 29일 본래의 위치로 되돌려 놓으면서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가 기념되기 시작하였다. 1989년 6월 24일 세워진 ‘순교 현양비’에는 당시 서산 해미성당 주임 신부 윤종관 가별[세례명: 가브리엘]이 짓고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순교지의 순교 내력이 담겨 있다.
[위치]
서산 해미읍성 진남문(鎭南門) 앞의 지방도 647호선을 따라서 성곽을 그대로 끼고 돌아 약 400m 가면 서산 해미읍성 서문이 나온다. 서문 밖의 순교 현양탑과 서산고등학교 정문 앞 일대가 순교지이다.
[형태]
약 240㎡ 면적의 기념지 안에 순교 현양비와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순교 현양비의 상부는 십자가 모양으로 다듬어졌고, 기단에는 ‘서문 밖 순교 성지’라는 가로 글씨와 순교 내력이 적힌 비문이 새겨져 있다.
[현황]
2011년 현재 해미읍성 서문 밖 순교지의 소유자는 천주교 대전교구이며, 관리자는 해미순교성지이다.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 밖에 지방도 647호선이 있는데, 지방도 647호선 상에는 본래 해미읍성 형장 길의 자리개돌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나라의 명을 거슬러 배교(背敎)를 거부한 사학죄인에게 서산 해미읍성의 서문은 운명의 기로(岐路)와도 같았다. 해가 지는 서쪽은 부정한 것을 버리고 삿된 것을 막는 곳이었다고 한다. 서문 밖이 사학죄인의 처형지가 된 것도 이런 연유였을 것이다. 정분문이라 하였던 서문의 이름처럼 지금은 한적한 소도시의 고요함을 간직하고 있지만, 동시에 진리에 몸 바친 백성들의 핏빛 절규가 서린 역설의 장소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