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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736
한자 烽燧
이칭/별칭 봉화,봉수대,봉화대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서정석

[정의]

조선 시대 충청남도 서산 지역의 관아에서 긴급한 상황을 중앙에 전하던 군사 통신 시설.

[개설]

봉수는 옛날에 널리 쓰인 통신 수단이다. 이를 봉화, 봉수대, 봉화대 등이라고도 한다.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로써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신호를 보내어 변경의 위급을 중앙에 통보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고려 때부터 비롯된 봉수 제도를 이어받아 좀 더 체계적인 봉수 제도를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1446년(세종 28)에는 봉수법이 제정되기에 이르렀고, 1447년 3월에는 연변연대(沿邊煙臺)와 복리봉화(腹裏烽火)[내지봉수(內地烽燧)]를 동시에 설치하는 제도가 확립되었다. 이에 따르면 연변봉수(沿邊烽燧)의 연대(煙臺)는 높이가 25척, 둘레가 70척이며, 연대의 바깥쪽으로 30척 밖에 참호를 파도록 하였다. 이때 참호의 규모는 깊이와 너비가 각각 10척씩이었다. 영조척(營造尺)으로 계산한다면 연대의 높이는 7.8m, 직경 6.95m이고, 둘레는 약 21.8m에 이른다. 이러한 연대의 밖에 있었던 참호는 깊이와 너비가 각각 3.1m이고, 둘레가 약 100m에 이르렀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조선의 봉수 제도는 노선에 따라 직봉(直烽)과 간봉(間烽)이 있고, 성격에 따라 다시 경봉수(京烽燧), 내지봉수[복리봉수], 연변봉수가 있다. 이중 서산 지역을 포함한 충청남도 서해안 일대에 설치되었던 봉수는 연변봉수에 해당한다. 이러한 연변봉수는 전라북도 옥구(沃溝)의 화산봉수(花山烽燧)에서 시작하여 충청남도 서천 운은산(雲銀山)→ 비인 칠지산(漆枝山)→ 남포 옥미산(玉眉山)→ 보령 조침산(助侵山)→ 홍주 흥양산(興陽山)→ 결성 고산(高山)→ 홍주 고구(高丘) 등을 거쳐 서산의 봉수로 이어졌다.

[현황]

서산 지역의 봉수로는 주산봉수(主山烽燧), 도비산봉수(都飛山烽燧), 안국산봉수(安國山烽燧)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 주산봉수: 가장 서쪽에 있었던 주산봉수는 현재의 서산 시내에 있는 봉화산(烽火山)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 최근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주산봉수는 더 서쪽에 있던 태안의 백화산봉수를 받아서 해미의 안국산봉수에 연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2. 도비산봉수: 가장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도비산봉수천수만을 향해 돌출된 반도의 남쪽 끝에 자리하고 있던 연변봉수다. 기록에는 조선 시대 서산군 치소에서 남쪽으로 7.2㎞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서산 시내에서 남쪽으로 약 10㎞ 떨어진 도비산의 정상부에 해당된다. 이 도비산봉수는 동쪽에 있었던 홍주목 관내의 성산봉수(城山烽燧)를 받아서 서쪽으로 태안의 백화산봉수에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였다.

3. 안국산봉수: 가장 북쪽에 자리한 안국산봉수는 서산과 당진의 경계 지점에 해당되는데, 서쪽으로는 서산의 주산봉수[북산봉수(北山烽燧)]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당진현의 고산봉수(高山烽燧)와 연결되던 봉수다.

이와 같이 해안가를 따라 설치되어 있었던 충청남도 지역의 연변봉수는 개항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되다가 다른 봉수와 마찬가지로 개항기 이후에 폐기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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