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5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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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鳳生里社倉址 |
이칭/별칭 | 봉생리 사창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봉생리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홍제연 |
소재지 | 봉생리 사창 터 -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봉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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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창 터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고북면 봉생리에 있는 조선 시대 사창 터.
[변천]
봉생리 사창 터는 조선 시대 홍주목에서 세곡을 보관하던 창고 중 하나인 서창(西倉)이 있던 곳이다. 봉생리 사창(鳳生里社倉)이 있던 자리는 지금은 내륙이지만 개간하기 전까지 바다에 접한 곳이었고, 그 위치로 보아 서해안 수로 교통에 바로 연결되는 요충지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 관제 개정 이전까지는 행정 구역상 홍주목에 속하던 곳이었으며, 봉생리 사창 역시 홍주목에서 관할하였다. 최초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부터 기능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후기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의 홍주목 창고조에는 “서창이 홍주목 관아에서 서쪽으로 40리 떨어진 고북면(高北面)에 위치하며 27칸 건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786년(정조 10) 7월 16일 『정조실록(正祖實錄)』 기사에는 “홍주(洪州) 서창면(西倉面)은 해미(海美)와 경계를 맞대고 있으며 바다 물결이 넘실거려 본래부터 ‘하늘이 만든 정박처’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 해미현(海美縣)에 예속시키려는 논의도 있었다. 그리고 『정조실록』 9월 20일 기사에 따르면, 해미의 선창(船艙)을 서창이 있는 곳으로 옮기기 위해 굴착을 하려다 옳지 않다는 견해에 따라 무산되기도 하였다.
1925년에 간행된 『홍성군지』에는 홍성의 서창은 고북면에 속하여 고남, 고북, 운천 3개 면의 환미(還米) 530석 4승 7합 5작을 보관하였었는데, 당시에 이미 훼철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항기 때 훼철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에 봉생리 사창에 곡식을 모았다가 군산·장항·인천항까지 배로 운반하였는데, 당시 배 1대에 400~500여 섬을 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위치]
서산시 고북면 소재지에서 국도 29호선을 따라 남쪽 홍성 방향으로 가다 보면 2.5㎞ 거리에 서쪽으로 난 소로가 있고, 소로를 따라 1.7㎞ 정도 가면 서산시 고북면 봉생리 서창마을에 이른다. 봉생리 사창이 있던 곳은 서산시 고북면 봉생리와 홍성군 갈산면 동성리의 경계 지점으로, 고북저수지에서 서쪽 바다로 흘러드는 소하천과 접해 있다. 주민들의 전언과 주변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을 통해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현황]
봉생리 사창 터 일대는 천수만 간척 사업으로 농지가 되어 있지만, 개간 전에는 마을 앞이 해안이었다. 간척 사업 시 봉생리 사창 터의 남단부 10m가량을 붕괴하여 둑을 만들었기 때문에, 봉생리 사창 터 지역으로 추정되는 권역의 남단부는 거의 파괴된 상태이다. 전에는 봉생리 사창 터 주변에 많은 주춧돌과 기와편이 있어서 주춧돌을 인근의 제방 공사 때에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주춧돌의 크기가 매우 컸다 한다.
[의의와 평가]
봉생리 사창 터를 통하여 조선 시대 홍주목의 세곡 보관 경로를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