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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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瑞山海美邑城 |
이칭/별칭 | 탱자성,해미읍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동문1길 36-1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해준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서산 해미읍성 사적 제116호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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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서산 해미읍성 사적 재지정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417년 - 착공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0년~ - 원형 복원을 위한 정밀 발굴 조사가 10여 차례에 걸쳐 수행되었으며, 2011년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음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847년 - 현감겸영장 박민환이 개축 |
개축|증축 시기/일시 | 1970년~ - 2011년 현재까지 성벽과 성문, 해자와 포루 등에 대한 연차적인 보수 공사가 실시되고 있음 |
현 소재지 | 서산 해미읍성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87 |
원소재지 | 서산 해미읍성 -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87 |
성격 | 읍성 |
관련 인물 | 박민환 |
크기(높이,길이,둘레) | 4.9m[높이]|약 1,800m[둘레] |
면적 | 196,381㎡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서산시 |
문화재 지정번호 | 사적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있는 조선 시대 읍성.
[건립 경위]
서산 해미읍성(瑞山海美邑城)은 1416년(태종 16) 이후 예산 덕산(德山)에서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이 서산으로 이설된 뒤, 1652년(효종 3) 청주로 옮겨 가기 전까지 약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거점성이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해안 방비를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집중적으로 시행하였다. 태조는 평소 “국가에서 근심하는 바가 왜적보다 심한 것이 없다”고 강조하였는데, 이는 고려 말부터 자행된 극심한 왜적의 침입에 대처하였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서산 해미읍성은 이러한 왜구의 침입에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거점이다.
1416년부터 조정에서는 효율적 방어를 위해 당시 예산 덕산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을 좀 더 해안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산 해미가 새로운 병영지로 선택된 데에는 해미가 이산(伊山)·순성(蓴城)·남포(藍浦) 3진(鎭)의 중간 지점으로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이며, 동시에 교통의 요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병영은 1417년(태종 17)부터 1418년(태종 18) 사이에 신축이 진행되었고, 1418년 마침내 병영의 해미 이설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군사 전략에서 수도 방비의 개념이 부각되면서 병영이 청주로 이설되었고, 읍성에는 해미현(海美縣)의 관아가 옮겨졌다. 서산 해미읍성이라는 명칭도 이때 개명된 것으로, 본래는 해미 내상성(海美內廂城)이었다. 하지만 서산의 해미는 여전히 서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 요지였기 때문에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된 호서좌영으로서 내포 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였다.
서산 해미읍성은 조선 초 축성 이후 약 600여 년간 수차례의 변형과 보수의 과정을 겪었다. 현재 성의 모습은 대체로 1847년(헌종 13) 현감 겸 영장 박민환이 크게 개축한 이후에 완전히 형태를 갖춘 것이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 탱자성이라고도 불렸다.
[위치]
서산시 해미면 소재지에서 남문2로를 따라 남동 방향으로 약 370m 정도 내려가면, 왼편으로 서산 해미읍성으로 진입하는 진남루가 있다.
[형태]
면적은 196,381㎡이며, 둘레는 약 1,800m이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문은 주 출입구이자 남문인 진남문(鎭南門)이 아치 모양의 홍예문(虹霓門)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밖에 동문과 서문이 있고, 성내에는 동헌(東軒)과 어사(御舍), 교련청(敎鍊廳), 작청(作廳), 사령청(使令廳) 등의 건물이 있다.
[현황]
2011년 현재 서산 해미읍성은 국가 소유로 서산시가 관리하고 있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문화재의 보호와 관리를 위해 성안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1970년 이후부터는 성벽과 성문, 해자와 포루 등에 대해 연차적인 보수 공사가 실시되어 2011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원형 복원을 위한 정밀 발굴 조사 역시 1980년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수행되었는데, 이 또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한편 서산시에서는 서산 해미읍성을 활용한 축제와 관광 상품을 개발하고 있는데, 특히 매년 6월에는 ‘해미읍성 문화 축제[해미읍성 역사 체험 축제]’가 개최된다. 또한 서산 해미읍성은 내포 지역 천주교의 역사에서도 의미가 깊은 곳이다. 조선 말 약 3,00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한 대표적인 순교 성지 중 한 곳이다. 때문에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매년 서산 해미읍성을 방문하여 그 뜻을 새기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서산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읍성 중 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특히 충청병마절도사영과 호서좌영이 설치된 서해안의 군사적 거점이자 해미현의 치소가 자리한 행정성으로서 역할을 하였다. 이외에도 내포의 동학과 한말 의병 활동, 천주교 박해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최근에는 이를 활용한 역사 문화 축제가 개발되어 일반인들의 방문이 증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