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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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省 |
영어공식명칭 | An Seong |
이칭/별칭 | 안소목(安小目),습지(習之),일삼(日三),설천(雪泉),천곡(泉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윤종준 |
[정의]
조선 전기 문신으로 경기도 성남시의 세거 성씨인 광주 안씨의 중시조.
[개설]
안성(安省)[1344~1421]은 조선 세종 3년까지 활동한 문신이다. 조선 개국 후 처음으로 청백리에 뽑힌 3인 중 한 사람이며, 한쪽 눈이 작아서 이름을 ‘소목(小目)’이라 하였는데, 벼슬을 하면서 임금의 명령으로 ‘성(省)’으로 고쳤다.
[가계]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습지(習之)·일삼(日三), 호는 설천(雪泉)·천곡(泉谷)이다. 아버지는 안기(安器)이다.
[활동 사항]
광주 안씨의 시조는 안방걸(安邦傑)이지만 성남[현 경기도 광주 포함] 일대에 집성촌을 이룬 중시조는 안성이다.
안성은 고려 우왕 초에 생원이 되었고, 1380년(우왕 6)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보문각 직제학을 거쳐 상주판관이 되었다. 조선이 개국하고 1393년(태조 2)에 청백리로 뽑힌 3인 중 한 사람이다. 개성유후(開城留後)에 임명되었을 때, 고려의 벼슬을 한 사람으로 개성에 가서 조상의 혼을 대할 수 없다 하여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였다. 좌우에서 죽이려 하는 것을 태조(太祖)가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질 것이라 하여 밖으로 추방되었다. 훗날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학문과 저술]
우리 나라의 성씨 대부분은 고려 전기에 형성되었다. 광주 안씨도 고려 태조 때 안방걸이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지면서 형성된 성씨이다. 각 성씨의 족보는 조선 후기 이후에 편찬된 것으로 전한다. 안성이 조선 전기에 광주 안씨 족보 3권을 만들었다고는 하나 전하지는 않는데, 그 서문은 남아 있다고 안정복(安鼎福)[1712~1791]이 광주 안씨 「족보발(族譜跋)」에서 언급하고 있다.
[묘소]
안성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중대동 텃골의 광주 안씨 광양군파 종택 뒷산에 있다.
[상훈과 추모]
안성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선창리에 있는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