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3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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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九萬 |
이칭/별칭 | 운로(雲路),약천(藥泉),미재(美齋),문충(文忠)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종준 |
출생 시기/일시 | 1629년 - 남구만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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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711년 - 남구만 사망 |
거주|이주지 | 남구만 거주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
거주|이주지 | 남구만 거주지 -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
거주|이주지 | 남구만 거주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
묘소|단소 | 남구만 선생 묘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 산1-5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의령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성남 지역에서 살았던 문신.
[개설]
남구만(南九萬)[1629~1711]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면서 서예가이고, 시조(時調) 「동창이 밝았느냐」를 남긴 인물이다.
[가계]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미재(美齋)이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남재(南在)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현령 남일성(南一星)이다.
[활동 사항]
남구만은 1651년(효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효종 7)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대사간, 형조판서, 대제학,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대표적인 소론 대신(少論大臣)이었다.
1696년(숙종 22) 사직을 청하였으나 숙종(肅宗)이 계속 중요한 일을 맡기었다. 73세가 되던 1701년(숙종 27) 경기도 용인의 비파담으로 돌아갔으며 77세 때 묫자리를 잡고 부인의 묘를 이장하였다. 1707년(숙종 33)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82세 때인 1710년(숙종 36) 3월에는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일대인 숯골[탄동(炭洞)]의 선영 아래로 옮겨 가서 머무르니 임금이 다시 어의(御醫)를 보내었다. 그 해 가을 10월에 낙생리의 역촌(驛村)[현 성남시 분당 지역]으로 가서 머물렀고, 83세가 되었을 때는 율현(栗峴)[지금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율현동]으로 옮겼는데, 가는 곳마다 임금이 어의를 보내서 살피게 하거나 타락죽을 보내 주었다.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숯골 일대를 의령 남씨들이 많이 산다고 해서 ‘남씨편’이라고 불렀다. 남구만은 희빈 장씨(禧嬪張氏)의 책봉을 반대하는 등 정치의 격랑을 헤쳐 나왔다.
[학문과 저술]
남구만은 시조 문학의 걸작이라 할 수 있는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를 남겼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는 전원 생활을 노래한 측면도 있지만 당시의 혼탁했던 정치계를 풍자한 작품이라고 풀이된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었으며, 저서로 『약천집(藥泉集)』,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가 있다.
[묘소]
남구만의 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초부리 산1-5번지에 있으며, 경기도 용인시 향토문화재 제5호[남구만 선생 묘]로 지정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