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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100529
한자 樂生驛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신안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역참
관련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광주부읍지』|『세종실록지리지』

[정의]

조선시대에 지금의 성남시 분당 지역에 설치되었던 역참(驛站).

[개설]

역참(驛站)은 중앙과 지방 사이의 공문서 전달, 왕래하는 관리나 사신의 접대, 관수 물자의 운반을 뒷받침하기 위해 설치된 조선시대의 교통·통신 기관이다. 낙생역은 조선시대에 양재→천천현로→낙생역→구흥(용인)→김령(용인)→좌찬(죽산)→분행(죽산)→무극(음죽)→강복(안성)→가천(양성)→청호(수원)→장족(수원)→동화(수원)→해문역(화성 남양)에 위치했던 역참(驛站) 중의 하나이다.

한편 조선시대의 역도(驛道)는 41~44도로 구분되어 역의 효율적인 운영을 도모하였다. 전국 도로는 크게 간선 도로와 지선 도로로 구분되었는데 간선로는 도성 내의 광화문을 기점으로 전국 주요지 10곳과 연결되었고, 지선의 경우 지방 관읍과 관읍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도로의 이용도(중요도)에 따라 역로는 대・중・소로 차등되었으며, 역은 30리마다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형성 및 변천]

낙생역이 있었던 이 도로는 일찍이 삼국시대 이후부터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보이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한양 도성에서 삼남지방(충청도·전라도·경상도)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주요한 교통로의 구실을 하였다.

고려시대에 설치된 안업역(安業驛)이 조선 초기에 낙생역으로 개칭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돌마역(突馬驛)으로도 불린다. 낙생역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광주목조에서 판교원(板橋院)과 같이 '주(州)의 남쪽 45리에 있다'고 하였으며, 『경기도읍지』의 『광주부읍지』에서는 '낙생역은 주(州)의 남쪽 40리 돌마면(突馬面)에 있다'고 하였다.

조선의 한양 천도 이후 도성에서 광주를 거쳐 용인-죽산-이천-음죽-충주에 이르는 길은 조선시대에 부분적인 개편을 통해 역로로 확립되었다. 1415년(태종 15) 12월 병조(兵曹)가 돈화문(敦化門)을 기점으로 서쪽의 영서역, 남쪽의 양재역, 장성곶, 동쪽의 명석원, 평구역까지, 북쪽의 광시원, 녹양역까지 각 30리를 1식(息)으로 하여 1식마다 1역을 설치하였는데, 서울 도성으로부터 양재역을 지나 낙생역에 이르는 역로는 태조, 태종대를 전후하여 확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도성에서 낙생을 지나는 역로는 양재(과천)-낙생(광주)-구흥(용인)-김령(용인)-좌찬(죽산)-분행(죽산)-무극(음죽)에 이르는 교통로였다. 이후 성종대에는 양재도와 경안도, 평구도로 나뉘었는데, 양재도에는 낙생역(광주)이, 경안도에는 풍덕역(광주)이, 평구도에는 봉안역(광주)이 관할되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 도성에서 양재역을 지나 낙생역(광주)-구흥역(용인)-김령역(용인)-좌찬역(죽산)-분행역(죽산)-무극역(음죽)에 이르는 역로가 확립됨으로써, 양재-낙생대로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선시대 낙생역에 지급된 마필(5)과 노비(4)의 수가 광주에 설치되었던 역(덕풍・경안・봉안・양재) 중 가장 적어 조선시대 초기와는 달리 시기적으로 뒤로 갈수록 퇴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위치비정/행정구역상의 구분]

낙생역은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한양에 이르는 주요 길목에 설치되었다. 현재 성남시 분당구 수내 2동에 위치한 중앙공원 앞의 수내로돌마로가 갈라지는 분기점인 역말 광장 일대와 수내동 푸른마을 주변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관련기록]

낙생역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좌도충청도(양재→ 낙생→ 시흥→ 김령→ 좌찬→ 분행→ 무극)에 속해 있으며, 『경국대전』에는 낙생역이 양재역과 함께 대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하지만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돌마역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세종실록지리지』(1454), 『신증동국여지승람』(1531), 『동국여지지』(1660년대), 『도로고』(1770), 『만기요람』(1808), 『대동지지』(1864) 등 조선 전・후기의 자료 모두 낙생역으로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돌마역은 오류이거나 혹은 『여지도서』편찬 시기 이곳으로 이전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현재까지 정확하게 파악되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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