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1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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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盆唐區藪內洞地域-誌-史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수내동 |
전에 수내동에는 100여호 정도 살았는데, 숲안, 역말, 넘어말 등 세 마을로 구성되었다. 수내동의 유래는 이곳 마을이 안 보이게 그 앞으로 큰 나무들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숲안’이라고 불리다가 ‘수내리’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나무는 조선시대 청백리였던 한산이씨 이병태 선조가 많이 심었다고 한다.
마을의 역사적 사건으로는 6·25전쟁 때 면사무소 직원, 선생님, 농협직원들 28명(돌마면 내)이 공산군에게 학살된 일을 들 수 있다. 이후부터는 마을에서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고 있고, 1·4후퇴 후에는 중공군이 이 마을을 점유하여 집을 뒤져 미곡을 가져가고 차용증을 써주었다.
마을의 중요 인물은 한산이씨로 조선시대에 세 판서를 지낸 이증 선조를 들 수 있다. 이곳에 그 부조묘가 있고, 그 아들인 좌랑공 이경류는 임진왜란 때 상주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또 청백리 이병태라는 유명한 분과 조선 말에 학부대신을 지낸 이용직을 들 수 있다. 근래에는 주미공사를 지낸 이승수가 있다.
마을의 중요한 유적은 6·25전쟁 때 많이 소실되고 남은 것은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한산이씨 묘역과 한산이씨 3세 사적비, 이증 사당(숭모문), 수내동가옥, 한산이씨 묘산 입수비(入首碑) 3개가 있다. 그밖에도 말무덤(이경류의 애마), 아전무덤 등이 있다.
마을의 산업은 주로 벼농사였으며, 여름에 수박, 참외를 주로 심고, 김장 배추, 무를 심었으며, 각 집마다 닭이나 소를 한두 마리씩 키웠다. 양잠도 하여 뽕잎을 따다 주는 일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전매청의 허가를 받아 담배를 심기도 하였다.
시장은 분당에 5일장이 있었고, 판교가 5일장 있어서 이용했는데 대부분 자급자족이었고, 행상이나 보부상이 파는 어물 등을 사기도 하였다.
인접한 마을은 남쪽으로 정자동, 동쪽으로 분당동, 그 옆이 지금 서현동이다. 인근 마을과 친선 축구경기나 씨름을 체급별로 겨뤘다.
교통은 일제 때부터 서울 을지로 6가에서 버스 한 대가 분당까지 왔다. 6·25전쟁 후에는 수원으로 가는 버스노선이 생겨서 중학교 다닐 때에는 수원에 단골서점이라는 곳을 많이 갔었다.
그밖에 집성촌에 살아서 좋은 점, 나쁜 점이 있는데, 우선 어렸을 때 밖에 나가면 아저씨, 조카님, 대부라고 불러야 하고, 호칭이 ‘야, 임마’라고 하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또 항렬이 있어서 나이가 어려도 아저씨라고 부르게 되고, 함부로 뭘 못하고 조심해야 될 게 많았으며, 인사를 잘해야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