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96 |
---|---|
한자 | 姜圭彦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금순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4월 17일 - 강규언 출생 |
---|---|
수학 시기/일시 | 1914년 - 강규언 영명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5일 - 강규언 군산 지역 3·1운동 참여 |
몰년 시기/일시 | 1927년 4월 15일 - 강규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 강규언 대통령표창 추서 |
출생지 | 강규언 출생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
학교|수학지 | 영명학교 - 전라북도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 |
성격 | 항일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영명학교 학생|광선의숙 교사 |
[정의]
3·1운동 때 군산 지역 만세 운동에 참여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출신 항일 운동가.
[개설]
3·1운동 당시 군산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은 기독교계 학교인 영명학교와 구암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태생인 강규언(姜圭彦)은 기독교 신자로서 같은 제주 출신인 강문호(康文昊)와 함께 군산 영명학교에 다니던 중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때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에 유공이 인정되어 1993년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활동 사항]
강규언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문동 태생으로, 강문호와 같이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1914년 기독교계 학교인 전북 옥구군 개정면 구암리에 있는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에 입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영명학교에서 서울의 3·1운동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서래장날인 3월 6일을 거사날로 잡아 만세 운동을 하려고, 학교 기숙사에서 영명학교 교사·학생들과 함께 독립선언서 7천여 장을 비밀히 만들고 태극기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주도했던 교사들이 거사 전날인 3월 5일 새벽에 사전 검속(檢束)되어 거사 계획이 좌절될 뻔 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교사들이 학생 간부들과 긴급회의를 열어 당일 곧바로 시위하기로 결의함에 따라 강규언 등이 앞장서 시위에 들어 갔다.
강규언은 양기철(梁基哲)·전세종(田世鍾) 등 다수 학생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군산 시내로 행진하였다. 학교가 있는 구암리에서 군산경찰서에 이르는 도중 독립선언서를 뿌리고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부르다 90여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강규언은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항소를 제기하여 1919년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 형사 1부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 다시 공부하기 위해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 중퇴하고 모교인 영명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그리고, 제주에 돌아와서는 모슬포 광선의숙에서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상훈과 추모]
강규언은 항일 운동 대한 공훈으로 1993년 대통령 표창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