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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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衣貴里金萬鎰墓域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능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1773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일우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 김만일 묘역 동자석 도굴·분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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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09년 7월 29일 - 의귀리 김만일묘역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의귀리 김만일묘역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재지정 |
현 소재지 | 의귀리 김만일묘역 -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1773번지 |
성격 | 묘역|묘 |
관련 인물 | 김만일 |
봉분 크기/묘역 면적 | 직경 5.4m, 높이 1.5m/123.69㎡ |
소유자 | 제주도 |
관리자 | 서귀포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에 있는 헌마공신(獻馬功臣) 김만일(金萬鎰)의 묘.
[개설]
김만일[1550년~1632년]은 조선 중기의 목장주이며 말사육가이고 공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중림(重臨)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1592년부터 인조대[1623~1649]에 이르기까지, 조선에서는 잇단 전쟁과 명나라의 잦은 요구 등으로 말이 부족하였다. 그러나 육지의 말 목장은 전란 등으로 거의 제구실을 못하였다. 김만일은 자신의 말을 수차례 국가에 바쳐 국난 극복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여 ‘헌마공신’으로 칭송을 받게 되었다. ‘헌마공신’의 존재는 조선시대에 오직 제주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김만일은 말을 바친 공으로 종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를 제수받았고, 서울에 올라가 관직에 나아가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에까지 다다랐다.
아들 김대길(金大吉)도 1658년(효종 9) 국가로부터 산마장(山馬場)의 감목관(監牧官), 즉 산마감목관을 제수 받았다. 산마감목관은 이후 김만일의 후손들이 세습해 1895년(고종 32)까지 이어졌다. 당시 감목관은 종6품으로 현감과 같아 제주도에서는 최고 지위에 해당하였다. 조선 후기까지 제주도에서 김만일의 가계만큼 높은 관직을 계속 이어가며 실질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던 일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위치]
김만일 묘역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1773번지 속칭 ‘서위남모루’에 자리잡고 있다. 그의 묘는 낮은 구릉상 대지에 부모 묘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본 묘의 좌향은 봉분 앞 상석의 방향으로 N-5。-E로 거의 정북향을 가리키고 있다.
[형태]
봉분은 원형봉토분으로 직경 5.4m, 높이 1.5m이다. 외곽의 산담은 제주의 자연석을 이용해 폭 1.5m, 높이 70~80㎝로 4~5단의 막쌓기로 이루어졌다. 길이는 동서 9.3m, 남북 13.3m 정도이다.
묘역에는 묘비, 혼유석, 문인석 등 여러 시설물이 있다. 묘비는 봉분 바로 앞이 아닌 동쪽 담장에 거의 붙어 서 있다. 봉분 앞의 상석은 화강암 석재로 제작되었다. 상석과 봉분 사이에는 ‘넋이 나와 놀도록 하는 돌’이라는 뜻을 지닌 혼유석(魂遊石)도 놓여있다. 봉분 가장 바깥쪽 양측에 산담과 거의 맞붙여 147㎝의 문인석 2기가 세워져 있다. 머리에는 복두와 같은 모자를 쓰고 있으며, 양 끝을 치켜 뜬 두 눈은 부리부리하고, 양 귀와 코는 큼직하게 표현되었다. 입술은 결의에 찬 듯 역삼각형으로 앙다물고 있으며, 수염은 무성하게 가슴까지 흘러내리고, 두 손은 아랫배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다. 특이한 점은 등 뒤쪽으로부터 앞쪽 겨드랑이 밑까지 띠와 같은 의복과 슬이 흘러내리게 표현되어 있는 점이다. 이들 문인석은 제작연대가 확실하기 때문에 조선시대 석상연구에 중요하다. 묘역 내에 동자석도 있었는데, 2004년에 도굴·분실되어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
[금석문]
묘비의 전면에는 ‘숭정대부 동지중추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김공지묘(崇政大夫同知中樞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金公之墓)’라는 명(銘)이 새겨져 있으나, 후면은 글자의 마멸이 심해 판독하기 어렵다. 비석의 높이는 90㎝, 폭 36㎝, 두께 11.2㎝이다.
[현황]
김만일 묘역의 봉분 1기·비석 1기·혼유석 1기·문인석 2기 등은 2009년 7월 29일자로 ‘의귀리 김만일묘역’이라는 명칭으로 묶여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김만일 분묘는 제주가 ‘말의 고장’이었음과 함께, 이에 힘입어 국난극복에 솔선수범하는 한편, 조선시대 제주인으로는 가장 높은 사회적 지위에 오르는 등의 입지전적 성취를 이뤘던 인간의 삶을 드러내는 표징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제주의 전통적 근간산업이었던 말 사육이 지녔던 영향력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한편 김만일 묘역은 17세기 중반 방형 산담을 가진 봉분의 축조양식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문인석도 돌하르방과 같은 형태의 제주형으로 제주 고유의 석물문화를 밝히는데 중요 자료가 된다. 김만일 묘역은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김만일과 그 가계의 정치·사회적 활동은 『조선왕조실록』이나 김만일 가계 소장 고문서 등을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제주도 내 다른 묘역 피장자와 차별화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