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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600575
한자 烽燧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나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5년 - 봉수제 폐지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 지역에서 전 근대 시기에 봉[횃불]과 수[연기]로써 급보를 전하던 통신 방법.

[개설]

봉수의 봉(烽)이라 함은 후표(候表)의 뜻으로 불을 피워서 통보하는 것을 의미하며, 시목(柴木)에 불을 질러서 그 연기를 바라보게 하는 것을 수(燧)라고 하여, 낮에는 연기, 밤에는 봉화를 들어 통보하는 제도를 말한다.

봉수의 횟수는 거(炬) 또는 거(擧)로 나타내는데, 여말 선초에는 무사시(無事時)에 1거, 유사시에 2거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것이 1419년(조선 세종 1)에 평상시에는 1거, 적이 나타나면 2거,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거, 국경을 넘어오면 4거, 접전을 하면 5거를 올리도록 정하였다.

[역사적 배경]

군사 목적으로 봉수를 사용한 것은 고려 시대 때부터 있었다. 제주에서 봉수와 연대 시설이 체계적으로 정비되어 본격적인 군사적 통신시설로 사용된 것은 조선 세종 때의 일로 보인다. 당시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韓承舜)은 “봉화 후망(候望)은 22개소이고, 봉군은 봉화마다 5명이며, 연대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가 각 10척”이라고 조정에 보고하고 있다. 또 숙종 28년(1702)에 부임한 이형상 목사는 『남환박물』에 제주에 “봉수와 연대가 63곳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봉수와 연대는 1895년 봉수제가 폐지될 때까지 때에 따라 위치와 숫자를 달리하면서 조선시대 대표적인 군사적 통신 수단의 구실을 하였다.

세종 원년(1419)에 거화거수법(擧火炬數法)으로 평시에는 1개, 황당선(荒唐船)이 나타나면 2개, 지경에 가까이 오면 3개, 지경을 범하면 4개, 접전하게 되면 5개를 올리는 5거법을 채택했다. 밤에는 횃불을 밝히고, 낮에는 연기를 피웠으며, 비가 오거나 날씨가 흐려 불이나 연기로 통신이 불가능할 때는 봉군이나 연군이 달려가서 연락을 취했다. 봉수와 연대의 주변 백보 내에는 봉화의 오인을 막기 위해 무당이나 통속적인 잡신제를 절대 금하였다.

[내용]

1. 설치

제주도의 봉수는 주로 먼 지역의 적선을 관망하기 위하여 오름 정상에 설치하였고, 연대는 해안에 정박하는 선박을 저지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적의 선박이 정박하기 용이한 해안에 주로 설치되었다.

2. 형태

봉수는 일반적으로 석축시설 없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려 그 위에 불을 피울 수 있는 시설을 하였고, 밑에는 배수시설로 도랑을 만들었다. 그 규모는 지형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나지만 대체적으로 높이와 너비가 각각 10척 내외였으며, 돌로 쌓았다.

3. 배치

각 봉수와 연대에는 별장 6인과 봉군 12~36명이 배치되어 1번[조]에 별장 2인 봉군 4~12명씩 3번으로 나누어 3교대로 24시간을 지켰다. 봉군은 인근에서 충당하되 이들에게는 다른 군역을 부과하지 않았다.

[현황]

제주도 서귀포시 내에 위치한 봉수의 수는 시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17세기 후반 이후의 「제주병제봉대총록(濟州兵制烽臺總錄)」에 의하면, 봉수는 25개소로 되어 있다. 제주목 소속의 봉수는 10개소, 정의현은 10개소, 대정현은 5개소 등이다. 서귀포 지역의 봉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표〉_GC04600575_01_대정현·정의현 소속의 봉수 현황

[의의]

제주도의 경우에도 봉수대는 멀리서 적선이 바다를 지나는 것을 살필 뿐만 아니라 연변의 급한 상황 보고를 경봉수에 전하는 내지 봉수의 기능을 담당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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