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4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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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萬寶山農民虐殺事件糾彈檄文配布事件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용철 |
[정의]
1931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출신 학생들이 ‘만보산 사건’을 규탄하는 격문을 제작 살포한 사건.
[개설]
만보산 농민 학살 사건 규탄 격문 배포 사건은 김만유·이갑문·김무안 등 서귀포 출신 3명의 학생과 홍병모·최금경·이동재·강정수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항일 운동이다. 이들은 1931년 5월부터 발생하여 7월에 절정이었던 소위 ‘만보산 사건’에 대하여 일제가 배후에서 조작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즉, 일제가 중국 동북 지역의 중국 농민과 한국인 이주 농민 사이에 분쟁을 조작한 후, 한국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동북 지역을 침략한 것으로 본 것이다. 곧바로 김만유 등은 ‘만보산 사건’에 대한 규탄 격문을 작성, 경성 시내의 각 중등학교에 산포하였다.
격문의 제목은 「전 조선 혁명적 학생들에게 격함」이었으며, 주요 내용은 “전 조선의 피압박 대중은 일제의 강도적 식민지·반(半)식민지 침략정책에 학살당하는 상황으로 만보산 농민 학살 사건에서 보듯이 일제는 조선인 옹호라는 미명하에 만주, 몽골의 권리를 강탈하려 하고 있다. 이에 전 조선의 혁명적 학생들은 노동자·농민 및 시민대중과 연대하여 제국주의 만주침략전쟁 절대 반대, 일본 군대 즉시 철퇴(撤退), 무산대중은 일치 단결 제국주의 타도” 등 이었다. 1931년 7월 17일까지 격문 2,000매를 인쇄하여 서울 시내 6개 학교에 산포하였다. 이듬해 5월 17명이 검거되어 그 중 6명이 기소되었고, 9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2심 재판을 받았다.
[역사적 배경]
당시 일본은 소련의 5개년 경제 계획을 군사 계획으로 간주하고, 이 계획이 중국 동북 지역에서의 일본 이익에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하였다. 중국도 국민당이나 공산당 모두 일본이 중국 동북 지역을 침략하고 있는 것에 대해 외교적 항의를 비롯한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과 중국의 반일 공동 전선 구축을 막기 위해 분열책을 써서 중국 길림성 장춘현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 농민과 중국 농민의 무력 충돌을 야기하였다. 결국 만보산 사건이 발생한지 두 달여 후인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였다.
[경과]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자, 당시 중앙기독교청년회 소속 학생인 김만유·홍병모 등이 주동이 되어 1931년 7월 5일 격문을 산포할 것을 결의하고, 7월18일까지 2,000매의 격문을 인쇄하여, 고등 예비학교[김창옥], 경성공립여자보통학교[이동재·김만유], 중앙기독교청년회 소속 학교[강정수],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이갑문], 실업전수학교[김무안], 휘문고등보통학교[홍병모·이동재] 등에 격문을 산포하였다. 이듬해 5월에 17명이 검거되어 6명이 기소, 재판을 받았다.
[결과]
김만유·홍병모·최금경·이동재는 징역 1년[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 이갑문과 강정수는 징역 6월, 집행유예 4년[출판법 위판], 김무안은 도피로 수배자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알리는 등 항일 운동을 서귀포 지역의 유학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전개한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