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4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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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濟州人-日本渡航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은자 |
[정의]
제주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제주에서 일본으로 가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일.
[개설]
일본 도항에 대해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합법적인 도항과 비합법적인 도항, 즉 밀항이 그것이다. 합법적인 도항은 일제강점기에 제주인들이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 내지로의 통행증을 가지고 이동하는 것을 말하며, 비합법적인 도항인 밀항은 통행증을 발급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동 수단에 숨어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말한다. 또 해방 후의 밀항은 일제강점기의 경우가 다르다. 주권을 찾고 영토의 국경이 확정된 상황에서의 밀항은 국경을 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국가 간 외교문제에 속하게 되는 차이가 있다. 제주인의 도항은 식민지의 피폐한 경제적인 현실을 반영한 결과로 일본 선발 자본주의 노동시장에서 임금 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비롯된 것이다.
[역사적 배경]
일본 도항의 시초는 해녀들인데, 1903년 제주시 김녕의 사공(沙工) 김병선(金丙先)이 해녀 수명을 데리고 도쿄부[東京府]의 미야케지마[三宅島]로 출가하였다. 1879년경 일본 통어선들은 잠수기선을 이용하여 제주도 연안에 진출하면서 제주도 어민들과 분쟁을 자주 일으켰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제주도를 포함한 조선의 전 지역의 어로권(漁撈權)을 탈취하였다. 잠녀에 의한 나잠어업에 의존하던 제주도민들은 일본 잠수기선의 남획으로 생활고가 가중되었다. 한편, 일본 통어선(通漁船)의 어로 기술과 어선(漁船), 어법(漁法)의 선진성에 자극을 받아 견습생이 돼 일본으로 도항하는 도민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런 반면, 1차 산업 중심의 제주도는 1905년 보리 흉년을 비롯하여 잦은 태풍과 홍수가 끊임없이 발생하여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었고, 그로 인해 제주 농민은 궁핍에 시달렸다. 게다가 일제의 수탈정책은 갈수록 심해져 제주도 농민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식민지 경영으로 농·어촌 경제가 위협을 받으면서 제주도 사람들은 그들의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시장이 필요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제1차세계대전의 호황으로 제조업 등 2차산업이 부흥하면서 세계 경제 대국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상대적으로 제조업 부문의 노동력 부족 현상을 겪고 있는 상태였다. 일본은 저렴한 노동력 확보를 위해 제주도에서 직공 모집을 하였고, 제주에서 변변한 일자리가 없었던 제주 사람들이 단순 노동자로 일본으로 도항을 하게 되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제주인을 강제 징발하는 방법으로 일본으로 데려갔다. 해방 후 귀환하지 못한 제주인 도항자들은 주로 오사카나 도쿄 등지에 거주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과]
1. 제주인들의 도항
일제강점기 제주인들은 살길을 찾아 선발자본주의 공업국가인 일본으로 노동력을 팔기위해 도항하였다. 도항의 원인으로는 극심한 경제적인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우와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오사카부 셋쓰방적공장 등 여러 회사들은 제주도에 노동 브로커를 파견하여 제주인을 모집해 일본으로 데려갔다. 오사카로 진출한 제주인들은 우수 직공으로 인정받자 제주인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도항자 수도 점점 증가하였다. 1919년 일본의 공업 호황기를 맞으면서 한신(阪神) 공업지대로부터 제주도 노동자 모집이 증가하였고, 돌아오는 도항자의 물질적인 생활에 자극받아 제주인들의 도항은 더욱 늘어났다. 1922년 후쿠오카에 있는 미쓰비시 탄광회사의 광부 모집으로 제주인들은 기타규슈[北九州]의 공업지대로 진출하였는데 그 인원수는 3,503명[남자 3,198명, 여자 305명]이나 되었다.
이처럼 제주인 도항자들은 주로 한신 공업단지와 오사카 공장지대 등지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돈을 벌어 귀향하였다. 제주인 도항자 증가는 오사카-제주 간 직항로의 개설과 관련이 깊다. 1923년 아마가사키[尼ヶ崎] 기선의 제2군대환(第2君代丸)이 오사카-제주 간 직항로로 개설되었고, 1924년에는 조선우선(朝鮮郵船)의 경성환(京城丸)에 의해 오사카-제주 간 항로가 다시 개시되면서 제주인들의 오사카로의 도항이 수월하게 되었다. 1924년에 제주인의 도항자는 14,278명으로, 2년 전에 비해 4배가 넘었고, 같은 해 귀환자는 5,107명이나 돼 1년간 제주인 도항자는 왕복 20,000 명이나 되었다. 1925년에는 제주인 도항자는 15,906명에 귀환자는 9,646명, 1927년 도항자는 19,224명에 귀환자는 16,863명이나 되어 연간 왕복 도항자는 3만 6천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1933년이 되면 제주인 도항자는 29,208명에 이르게 되었고, 귀향자는 18,062명이나 되었다. 또 1934년에는 도항자 수가 약 5만 명에 이르러 제주도 전체 인구의 25%에 달하였다.
2. 서귀포인들의 도항
1934년 4월, 당시 서귀포 지역은 법환리는 도항자가 330명 남짓, 하효리는 200명 이상이었고, 호근리를 포함한 각 이마다 100~300명이나 되며, 성읍리 70명, 그 외 산남의 지역 마을들은 약 50명 미만의 도항자가 있다.
서귀포가 도항자가 많은 것은 입지적인 조건 때문인데, 일본인 56호에 61세대가 서귀포에 살고 있어서 일본인과 접촉이 쉬워 일본에 대한 사정을 잘 알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제주도 내 제1의 자연 항구인 서귀포항이 있어서 도항과 귀향이 다른 지역보다 수월했기 때문이다.
[결과]
전도적인 제주인 도항으로 인해 제주도 노동력은 감소하여 노동 임금이 상승하는 노동력 역부족 현상을 보였다. 이처럼 1930년대 중반 도항자가 계속 늘어나는 이유는 제주도의 불안한 식민지 경제생활의 원인이 크겠지만, 사회적인 상황 또한 도항을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졌다. 도항이 늘어난 이유를 세부적으로 정리하면, 오사카나 기타큐슈 공업지대의 노동 브로커에 의한 모집, 계(契) 조직 및 친족의 원조, 귀환자의 지인(知人)을 유인한 재도항, 제주도 공제조합 및 해녀조합의 출가 권유 등이 도항자를 늘어나게 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말이 되면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일본은 노무자 강제동원을 실시하여 많은 수의 조선인 노동자를 전선과 군수산업에 배치시켰다. 해방 당시 약 20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일본에 있었고 그 가운데 제주인 또한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약 140만 명이 귀향하였을 뿐 나머지 인구는 일본에 그대로 남았다. 오사카는 바로 재일 제주인의 주요 거주지로 해방 후 재도항자나 밀항자들의 연고지가 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주인 도항자들의 일제강점기 제주 경제에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며, 도항자 중 일부는 현재 일본에 살고 있다. 이들 재일 제주인들은 고향의 사회 기반 시설, 장학 사업에 이바지한 공이 크다. 그들은 어려운 타지에서 힘든 일을 참고 자수성가하여 고향 제주에 끊임없이 후원사업을 하고 있으며, 오사카 등지에 터를 잡고 살면서 제주에 있는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고, 제주인의 도항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제주인의 일본 도항은 도항자에게는 생계 유지를 위한 수단이었을지 모르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원대한 세계 제국건설을 위한 노동시장 유인의 결과로서, 제주인들의 저렴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자본주의적인 교환 가치로서의 의미가 있다.
또한 도항자들은 일본에 체재하며 기반을 잡고 살고 있지만 일본 내에서의 차별과 정체성에 대한 갈등 또한 크다고 하겠다. 도항자들의 후세인 뉴커머들의 결혼·교육·문화적인 갈등은 재일 제주인 사회의 중요한 현안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 과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