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468 |
---|---|
한자 | 三一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찬식 |
[정의]
일제 강점기인 1919년 3월 서귀포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 운동.
[역사적 배경]
1919년 3·1운동은 서울·평양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작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되었다. 제주도에서는 휘문고보 학생이었던 김장환(金章煥)이 서울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귀향하여 삼촌 김시범(金時範)·김시은(金時殷) 등 제주시 조천면 유지들과 밀회하였다. 이 자리에서 그는 경향 각지의 사정을 알리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경과]
이들은 1919년 3월 21일 조천 미밋동산에 모여서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행진에 돌입하여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를 전개하여 신촌까지 나아갔다. 이 시위에는 김시범·김시은·김장환 외에도 김용찬(金容燦)·고재륜(高載崙)·김형배(金瀅培)·황진식(黃鎭式)·김경희(金慶熙)·김필원(金弼遠)·김희수(金熙洙)·이문천(李文千)·박두규(朴斗圭) 등이 참여하였다. 이어서 김필원·백응선(白膺善)·박두규 등은 3월 22일 조천리에서 재차 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리고 3월 23일에는 백응선·이문천·김연배(金年培) 등이 조천리에서 함덕리에 이르는 사이에서 많은 군중과 더불어 시위를 하였고, 김년배는 그 다음날인 24일에도 함덕리 장터에서 그곳에 집합한 많은 군중과 함께 시위를 전개하였다.
[결과]
조천만세시위운동에 연루되었던 인사들은 일경에 검거되어 형량이 확정되어 복역하였다. 이들 가운데 백응선은 출옥 후에 옥고로 인하여 사망했는데, 3년 후에 김시범 등이 그 무덤의 비문을 세워서 기렸다. 조천만세운동에 참여한 운동가들은 출옥할 때 노동의 대가로 약간의 임금을 받았는데, 이 돈을 모아서 독립운동 기금에 쓰자고 하여 동미회(同味會)를 구성했고, 그 돈을 김희수가 관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서귀포에서도 일부 어촌에서 해상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며, 1백여 명의 시위대가 삼매봉에 올라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1920년대 이후 청년 지식인 중심의 항일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천만세시위운동의 매개 역할을 담당하였던 김장환의 부친 김시학(金時學)은 조천 출신 최초의 유학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이미 1917년 신익희(申翼熙) 등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한민족의 독립운동의 방법을 모색하였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이들의 민족의식이 투철하였음을 알 수 있고, 그 영향이 서귀포 지역은 물론 제주 전 지역에 파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