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46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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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近代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집필자 | 임승희 |
[정의]
개항기에서부터 광복 이전까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의 역사.
[개설]
1894년 갑오개혁에 따라 지방 제도에 관한 칙령 98호가 이듬해인 1895년 5월 26일에 반포되었다. 이 제도 개혁에 따라 제주 지역은 제주부가 되었고, 제주부 관할 하에 제주군·정의군·대정군 3개군이 설치됨으로써 제주 지방 행정 체제는 1부 3군제였다. 그러나 1896년 8월 4일 ‘13도제’의 시행으로 제주 지방 행정 체제는 제주목, 정의군, 대정군의 1목 2군 12면제가 되었다. 이때 제주 목사는 정의·대정 양군의 군수를 통할(統轄)할 수 있고, 제주 목사가 정의·대정의 양군을 통할함에 있어서는 관찰사와 동일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이때부터 제주 지방에서도 각급의 향회(鄕會)가 구성되고 당해 지역의 업무에 관한 의사를 협의 결정하는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 후 1906년 9월 24일 칙령 제47호에 의해 제주목이 제주군으로 개편됨으로써 제주 지역은 정의군·대정군을 포함하여 전라남도 소속의 3군 12면의 지방 행정 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조선 시대의 도 관찰사와 수령은 관할 지역 내에서 일반 행정권 이외에 사법권과 군사권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914년 전국적으로 부·군·면의 폐합, 정비 과정에서 정의군과 대정군이 폐지되어 종전 두 군의 관할 구역이 제주군에 통합되면서 제주 지역의 행정구역은 1군 13면이 되었다. 1915년 제주군이 제주도로 개편되어졌는데, 오늘날의 서귀포 지역은 당시 전라남도 제주도내 좌면과 우면에 속하였다.
그러나 1935년 제주도내 일부 면(面)의 명칭이 소재지의 리명(里名)을 중심으로 바뀌어졌는데, 이때 제주도의 좌면은 중문면, 우면은 서귀면, 중면은 안덕면, 신좌면은 조천면, 구우면은 한림면, 동중면은 표선면, 서중면은 남원면, 정의면은 성산면, 신우면은 애월명으로 개칭되었으며 대정면, 구좌면, 추자면의 명칭은 바뀌지 않았다. 이와 같은 1읍 12면의 제주도제는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해방될 당시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개항과 서귀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제주는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 놓여 있었다. 갑오개혁의 영향으로 근대식 행정 체제와 교육 제도가 마련되어 새로운 행정 관리가 등장했고, 신학문이 대두하였다. 일본 어업의 침탈이 본격적으로 가속화되고, 천주교를 대표로 하는 서양 종교 및 문화가 유입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근대의 물결은 서귀포 지역도 예외 없이 밀려들어 왔다.
개항 이후 어수선한 제주 사회에서 20세기 벽두에 발생한 ‘이재수의 난’은 대한 제국 정부의 봉건적 수탈에 저항한 민란이면서,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구 열강의 문화적 침탈에 저항한 민중 운동이었다. 이재수 난의 발생 원인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관리의 폐단과 천주교 교회당의 폐단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의 단서가 되었던 곳은 서귀포 한논[하논]에 설립된 천주교 교회였으며,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사건은 하효리 오신락 노인의 사망 사건이었다.
1900년 한논에 교회를 설립한 김원영 신부가 열강 프랑스의 지원을 배경으로 교세를 키워가던 중 마을의 신당을 파괴하고 신목을 베어버리는 등의 무리한 포교가 이루어지면서 자주 주민들과 충돌하였다. 1901년 2월 정의군 하효리의 오신락 노인이 교당에 끌려가 죽는 사건이 터지면서 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다. 더구나 일부 교민들은 봉세관 강봉헌의 중간 징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주민들을 더욱 격분하게 하였다. 이러한 세폐와 교폐에 대항하기 위하여 대정군에서는 사설 상무사(商務社)가 조직되어 교민들과 사사로운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결국 1901년 5월 초 중앙의 조세 수탈에 저항한 민회가 열리고 민란은 시작되었다. 봉세관의 조세 수탈을 시정하기 위하여 일어난 민란은, 강봉헌이 도망쳐버린 데다 교민들의 한림 민회소 습격사건을 계기로 민군과 교회 측의 대결로 치달았다. 민군은 동서진으로 나뉘어 도민들을 규합, 세력을 강화시켜 제주읍성 남쪽 황사평에 주둔하였다. 이로부터 민군과 제주읍성으로 쫓겨 들어간 교민들 사이에 상호 살상이 이어졌다. 결국 서로의 접전 끝에 5월 28일 제주성 내의 주민들에 의해 성문이 열리자, 민군은 성내로 진입하여 제주성을 장악하고 교민들을 관덕정 앞에 모아 놓고 살해하는 참극으로 귀결되었다.
이 사건 직후 프랑스 군함 2척과 일본 군함 1척이 출동함으로써, 제주도를 둘러싸고 열강 간에 충돌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이 고조되었다. 결국 찰리사 황기연이 파견되어 와서 이재수 등 민군의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서울로 압송하여 감으로써 사건은 진정되었다. 1901년 10월 이재수·오대현·강우백 등 세 장두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피살된 교민들 중 연고가 없는 시신은, 프랑스의 압력에 의해 천주교 공동묘지가 된 황사평에 묻혀있다.
이 사건은 제주민들이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중앙과 지방의 갈등, 전통과 외래문화 사이의 충돌로 발발하였다. 20세기 벽두에 제주민들은 세계와의 만남을 제국주의적 문화적·경제적 침탈에 대한 충돌로 시작하고 있었다.
한편 제주도는 1896년경부터 일본인의 입도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되었는데 서귀포 역시 일제의 경제적 침탈이 활발하게 수행되던 곳이었다. 서귀포 지역에서는 일본 어민이 다수 정착하여 연안의 어업 활동을 독점하며 새로운 사회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어업 침탈 활동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문제에까지도 공공연히 개입하여 기존의 지역 주민들과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서귀포]
1910년 일제가 자신들의 자본 침투와 자원 침탈을 원활하게 할 목적으로 제주도내의 연안항 포구를 중심으로 식민지 개발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서귀포 지역에도 과거에는 소수의 주민만이 사는 한촌이었던데 비해, 1916년 제주도의 지청을 개설하면서 경찰관 주재소, 등기소, 우편소, 학교 등이 속속 설치되었다. 당시 서귀포항은 어업 근거지로 적당하기 때문에 각 지역으로부터 각종 어선이 모여들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에는 일본 잠수기업자와 어민이 상당수 서귀포에 거주하면서 이들에 의해 통조림 공장, 고래 공장 소금 제조를 통하여 어업의 이권에 깊이 개입하였고, 표고의 인공 재배에 착안 한라산 국유림을 임대하여 대규모 표고 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1907~1908년경에 대정 군수 출신인 채구석과 마을 유지들이 더불어 중문의 천제연 물을 이용, 중문리 일대에 논을 만들어 경작한 바 있는데 1923~1924년에도 천제연 바위틈을 뚫고 수로를 만들고 관개용수로 삼아 밭을 개간, 논을 만들어서 경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귀포를 통하는 교통망이 도로와 항로를 통해 연결되었다. 도로는 1912년부터 1913년에 걸쳐 도민에게 부역을 부담하여 전도적인 순환 일주 도로가 개통되었다. 이후 1926년 강성익이 서귀포에 남주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여 서귀포-모슬포간, 서귀포-성산간 을 운행함으로써 제주 일주가 가능하였다. 강성익은 이보다 앞선 1918년 서귀포 부둣가에 일본인 경쟁자를 물리치고 단추 공장을 세워 서귀포의 산업을 일으키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1920년대 서귀포항은 산지항, 성산포항, 모슬포항, 한림항 등과 더불어 제주의 중요한 항구 가운데 하나로 정기선이 기항하였다. 또한 1932년 한라산 중턱을 횡단하여 서귀포로 통하는 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서귀포의 물자 유통이 원활해졌고, 같은 해 제주-서귀 직통 도로가 완성되었다. 교통망과 더불어 통신망도 개설되었는데, 1915년 12월 제주-서귀포간에 전신 전화의 개통을 시작으로 우편소가 설치되었다.
한편 일제 강점기 제주사회는 한국의 다른 지역 못지않게 심한 식민지적 수탈과 착취, 민족 차별적 탄압을 받는 가운데 이전 시기보다 예속 상태가 더욱 심화되었다. 식민지 지배 체제가 구축되면서 1915년 제주에는 도제(島制)가 실시되어 초대 도사(島司) 이마무라(今村鞆)가 부임하였다. 도사는 제주 경찰서장을 겸임함으로써 행정과 경찰을 일원적으로 통치하는 막강한 실권을 쥐게 되었다. 모든 관공서에 일본인이 배치되었고, 교육 기관의 교장 및 교사들도 일본인으로 충원되었다.
이에 제주인들은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1918년 법정사를 중심으로 중문 지역의 주민들이 대거 참여한 항일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이 있기 전 처음으로 일어난 대중적인 항일 투쟁으로 기록되었다. 1919년의 조천 만세 시위 운동 이후 제주도의 항일 운동은 사회주의 청년 운동가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1925년 ‘신인회’ 결성을 시작으로 1930년대 중반 일제의 탄압 때문에 지하로 잠적할 때까지 도내 운동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시기 최고 절정을 이루었던 운동은 잠녀들의 투쟁이었다. 이 운동은 1931년부터 1932년 초까지 구좌면·성산면의 6개 마을 잠녀들이 관제화된 해녀조합의 횡포에 저항하여 일본인 도사(島司)를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이 투쟁에는 연인원 1만 7000여 명이 참여하였고, 검거된 사람만도 100여 명에 이르는 제주도 최대의 항일 운동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여성 운동·어민 투쟁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운동 세력은 지하로 잠적하고, 1940년대 전시체제하에서 도민들은 징병·징용·강제 노역 등으로 사상 최고의 압박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제주도 내에서도 한말 이래 신흥 세력들이 일제와 타협하며 자본을 축적하여 신흥 자본가로 성장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유지 세력이 형성되어 갔다. 이들은 1920년대 이후 각종 읍·면협의회를 주도하였으며, 조선인에게 주어진 읍·면장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들은 철저히 일제에 타협하는 친일파로 전락하기도 했지만, 지역 주민의 신망을 받으며 도민 편에서 각종 이권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들 자제 가운데 경제력을 바탕으로 서울이나 일본으로 유학한 청년 엘리트들이 많았는데, 사회주의·자유주의·아나키즘 등 서구 이념을 수용한 상당수의 민족 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3년 서귀 청년회가 조직되었고, 1925년 9월 23일 창립된 제주 청년 연합회에 가입하기도 하였다. 서귀포 중문 지역의 청년들은 대정 지역의 운동가들과 더불어 항일 사회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처럼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민족의식을 깨우치게 되어 민족 교육과 야학이 유행하였고, 그 결과 활발한 항일 운동이 펼쳐졌다. 또한 자본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새로운 삶의 방향을 밖에서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상상해 보지도 못했던 제주도 밖으로의 활발한 진출은 제주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군이 미군에 밀리기 시작하면서 제주도 근해의 상황이 심각해졌다. 1944년 봄부터 미 해군 잠수함이 제주 근해에 자주 출몰하였다. 일제는 1944년 5월 제주도 비행장을 완성하여 미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1944년까지만 하여도 제주도 수비 병력은 총 200여 명에 불과했다. 1944년 10월 미군에 의해 필리핀이 점령당하자, 일제는 제주도의 방위를 매우 심각한 문제로 여겼다. 1944년 12월 일본 방위 총사령부는 미군의 제주도 공략을 상정, 제주도를 전략상 요지라고 인식하게 됐다. 일본 군부에서는 막료를 파견하여 제주도를 시찰하게 하고, 연안 진지의 요새·보루·포대·참호 등을 구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1945년 초부터 제주도에 임시 포대의 엄호와 상륙 방어를 위한 해안가 진지 구축 작업이 시작되었다. 1945년 2월 9일 일본방위총사령관은 미군과의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7개 방면의 육·해군 결전 작전 준비를 명령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제주도 방어 작전으로서, 이른바 ‘결(決)7호 작전’이다. 1945년 4월 15일 제주도 방비 강화를 위해 제58군사령부가 신설 편성되었으며, 일본 본토의 부대를 비롯하여 만주의 관동군 등을 포함하여 종전 직전까지 4개월 사이에 무려 7만여 명에 달하는 병력이 제주도에 집결하였다. 제주도를 미군의 침공으로부터 사수한다는 방침을 정한 일본군 7만 대군은 제주도 전역을 요새화 하였다.
일본군은 8월이 되면서 해안선을 포기하고 중산간 지역 오름 일대로 옮겨갔다. 일본군은 이때부터 지구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해안선을 통한 미군의 상륙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중산간 지역에서 유격전을 통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다 죽겠다는 ‘옥쇄(玉碎) 작전’을 계획하였다. 당시 제주 주둔 제58군 사령부의 총지휘에 놓여있던 부대는 제58군 직속 부대, 제96사단, 제111사단, 제121사단, 독립혼성 제108여단, 제12포병 사령부, 해군 부대 등이다.
이처럼 제주도 내에는 일제 말기[특히 1944년 후반부터의 ‘본토 결전’ 시기] 일본군이 조성해 놓은 거대 군사 시설이 특히 서귀포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곳곳에 산재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일본군 군사 시설은 육군·해군의 비행장, 포대, 참호, 고사포 진지, 육·해군의 훈련장 및 감시초소, 대피소, 진지 동굴, 특공대 기지, 비행기 격납고, 탄약고, 폭탄 매립지 등을 총망라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한라산 중턱에 ‘머리띠를 두른 형국’이라는 뜻에서 ‘하치마키(鉢卷)’라는 군사 도로가 만들어졌으며, 이외에도 각 진지와 진지, 진지와 포구를 연결하는 군사 도로도 요소요소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