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6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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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溢東 |
영어공식명칭 | Han Ildong |
이칭/별칭 | 성중,옥람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
시대 | 근대,현대 |
집필자 | 한성주 |
[정의]
근현대 삼척 지역 서예가, 서화가,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한일동(韓溢東)[1879~1951]은 1879년(고종 16) 당시 삼척군 부곡현[현 동해시 부곡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시조 한란(韓蘭)의 28대손이다. 자는 성중(聲中)이고, 호는 옥람(玉藍)이다. 아버지는 월계(月溪)한승원(韓承源)이며, 할아버지는 춘사(春史)한진유(韓鎭裕)이다. 한일동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한진유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글씨 역시 가학(家學)인 것으로 전해진다. 중년 이후에는 스스로 배웠다. 특히 시서화는 독학으로 터득하였다. 1892년(고종 29)에 강릉최씨와 결혼하였다가 1915년에 사별하였으며, 1916년에 강릉김씨와 재혼하여 1남 5녀를 두었다.
1911년 봄 평양대동강 변의 부벽루(浮碧樓) 현판 휘호 백일장에서 장원이 된 한일동이 부벽루의 뒷면 글씨를 쓰고 부벽루에 걸리게 되었다. 1924년에는 삼척군 북평동에 중건된 만경대(萬景臺)의 현판 글씨를 썼다. 묵중한 기품을 풍기는 만경대의 현판 글씨에서는 석봉(石峯)한호(韓濩)[1543~1605]의 서풍이 엿보인다. 한일동은 커다란 글씨의 해서와 행서에서 한석봉체를 근간으로 고졸한 서풍을 완성하였다. 한일동은 어려서부터 석봉한호의 글씨에 뜻을 두고 배운 것으로 전해져 온다. 한편 계남(桂南)심지황(沈之潢)[1888~1964]의 시에는 한일동이 “종요나 왕희지의 서법을 구사했다.”고 전하고 있다. 한일동은 중년 이후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 5체에 모두 통달하였다. 특히 해서와 행서가 특기이며, 소필보다는 대필에 능하였다. 한일동은 시·서·화 모두 능하였으며, 사군자를 비롯한 문인화 방면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여 주었다.
한일동은 고향에 돌아오기 전까지 주로 함경도, 평안도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서예가로 이름을 알렸다. 한일동은 주로 활동한 함경도, 평안도 지역에서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한일동의 유묵(遺墨) 또한 지금의 북한 지역에 더 많이 남아 있다. 한일동이 고향 인근보다 먼 함경도와 평안도 등지에서 활동한 이유는 중년에 독립군에 가담해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집안이 부농이던 한일동은 가산을 팔아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한일동은 1942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만재(晩齋)홍낙섭(洪樂燮)[1874~1918], 계남(桂南)심지황(沈之璜)[1888~1964] 등과 교유하고 최홍희(崔泓熙)[1918~2002] 등 제자를 배출하는 등 영동 지역 서예계의 구심 역할을 하였다. 만재홍낙섭의 문집인 『만재집』에는 홍낙섭이 한일동의 집을 방문하고 “장서가 만 권이니 학문의 깊이를 쉬 알겠도다. 호탕한 성격은 일찍이 한유(韓愈)[768~824]와도 같아서 태산북두와 같은 그의 명성은 다시 동쪽 땅을 진동시키네.”라고 적고 있다. 이를 보면 한일동이 태산북두와 같이 여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당나라의 문장가이자 정치가이자 사상가였으며 문단에서 당송팔대가 가운데 제1인자로 꼽히는 한유에 비유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집안에 서책이 많아 서재 이름을 만 권을 쌓아 놓고 학문을 닦는다는 뜻인 ‘만권재(萬卷齋)’ 또는 ‘만권당(萬卷堂)’이라고 불렀다.
이후 한일동은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현재 확인되는 한일동의 대표 작품으로는 만경대의 현판 글씨가 있다. 또 한일동 8폭 병풍 글씨, 옥람 10폭병, 한일동 사군자도, 한일동 글씨 등이 관동대학교 박물관과 삼척시립박물관 등에 남아 있다. 현재 북한 지역에는 한일동의 유묵이 다수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한편 한일동의 문집인 『옥람시고(玉藍詩稿)』 1편이 현전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954년 강릉시경포대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언덕에 제자들이 ‘옥람 한일동 선생 기념비’를 세웠지만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1992년 동해시 부곡동삼거리 공원에 ‘옥람 한일동 선생 기적비’가 건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