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7003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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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竹西樓內岩刻字 |
영어공식명칭 | Rock Inscriptions at Jukseor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길 44[성내동 9-3]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상수 |
[정의]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 주변 바위와 오십천 주변 절벽에 새겨져 있는 글씨.
[개설]
고려 후기에 건립되어 조선시대 삼척도호부 관아 건축물의 하나로 사용된 죽서루는 주변의 오십천 절벽 일대와 함께 송강정철(鄭澈)[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소개되면서 예부터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꼽히며, 삼척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삼척의 젖줄인 오십천에서 으뜸 절경지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사대부들의 유람 문화가 더욱 성행하면서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선비들의 유람처로 각광받은 장소로 유명해졌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 풍광에 매료되어 죽서루와 주변 절벽 바위에 자기 이름이나 관직명이나 장소명 등을 많이 새겨 놓았다.
[위치]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길 44 일원의 죽서루(竹西樓)[국보] 주변의 바위와 오십천 일대[명승]의 절벽에 위치한다.
[현황]
2014년 10월 삼척시에서 지역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대표하는 역사문화유산으로서의 죽서루와 오십천 주변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암각자에 대한 학술 조사를 가톨릭관동대학교 박물관에 의뢰, 2014년 10월 24일부터 2015년 2월 3일까지 암각자에 대한 전면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죽서루 주변의 바위에서 21건, 오십천 주변 절벽에서 191건 등 총 212건의 암각자가 확인되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암각자도 다수 확인되었다. 이곳에 새겨진 암각자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조선시대에 새겨진 것들이다. 이를 몇가지로 구분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조선시대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와 오십천 주변의 빼어난 경관이나 특정한 장소를 묘사한 암각자는 총 16건이 확인되었다. 이곳의 수려한 경관을 ‘금수벽(錦繡壁)’, ‘진주벽(眞珠壁)’, ‘응벽담(凝碧潭)’, ‘제일벽(第一壁)’, ‘무이구곡(武夷九曲)’, ‘석단농음(石壇濃陰)’ 등과 같이 유서 깊고 아름다운 글귀로 표현하여 새겨 놓았다. 그리고 ‘사단(射壇)’, ‘관덕지소(觀德之所)’, ‘무우대(舞雩臺)’, ‘문암(門巖)’ 등과 같이 특정한 장소의 이름을 새겨 놓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 죽서루에서 오십천 건너편의 과녁을 향하여 활을 쏜 장소인 ‘사단’과 활을 쏘는 사람의 덕을 살폈다는 ‘관덕지소’가 있었으며, 기우제를 지내는 장소인 ‘무우대’가 이곳에도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 명문세족 집안에서 태어나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박유(朴濰)[1606~1626]는 죽서루와 오십천 절벽의 아름다운 절경에 감탄하여 한시 2편을 지어 이곳 절벽에 새겨 놓았다. 그는 두타산무릉계의 상류인 호계와 관련해서도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2. 조선시대 삼척도호부 역대 부사들과 근대의 군수 이름은 총 40건이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군수 최윤정(崔允鼎)의 이름 1건을 제외하고는 39건이 모두 삼척부사 이름이다. 삼척부사 이름은 개별로 새긴 것도 있지만 이곳을 방문한 자식과 친지, 지인 또는 중앙 및 지방 관리와 함께 새기기도 하였다. 부사 오수채(吳遂采)[1692~1759]는 네 곳에 이름을 새겨 역대 삼척부사 가운데 가장 많은 이름을 남겼다. 특히 부사 정하언(鄭夏彦)[1702~1769]은 어진 수령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힌 ‘이은정하언미중수두주계단(吏隱鄭夏彦美仲樹杜柱桂檀)’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다.
3. 조선시대 삼척포진 역대 영장의 이름은 총 28건이 확인되었다. 그 가운데 영장 구억(具億)과 이장오는 2곳에 이름을 남겼다. 직명으로 ‘토포사(討捕使)’를 이름 앞에 붙인 영장은 박종무, 신재건, 이유천, 윤희풍, 이면주, 남윤풍, 이우원, 민광승, 이경정, 왕석주 등 10명이다. 그리고 이름 앞에 ‘영장(營將)’을 표기한 사람은 전치우, 정제규, 이정곤 등 3명이다. 나머지는 직명 없이 이름만 새겨 두었다.
4. 조선시대 역대 평릉도 찰방의 이름은 총 7건이 조사되었다. 직명으로 ‘평릉승(平陵丞)’을 표기한 사람은 지택구 혼자이다. 나머지는 직명 없이 이름만 새겼다.
5. 조선시대 중앙 관리나 지방 관리 이름과 관련해 총 90명이 확인되었다. 중앙과 지방에서 이곳 삼척을 방문한 관리 대부분은 공무상 출장 와서 함께 이름을 남겼다. 또는 삼척부사나 삼척영장과의 집안 관계 또는 친분 관계로 이곳에 온 관리들이 함께 놀고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나중에 영의정까지 지낸 채제공(蔡濟恭)[1720~1799]과 전 동래부사 이화(李墷)[1770~?], 전 무산현감 이복형(李復馨)[1784~?]은 삼척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이곳에 이름을 새겨 놓았다. 양양군수를 지낸 독립운동가 남궁억(南宮檍)[1863~1939]도 이곳을 방문하여 당대의 유명 서예가 김태석(金台錫)[1875~1953]과 함께 이름을 새겨 놓기도 했다.
6. 지역 및 타 지역 출신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이름은 모두 112명이 조사되었다. 이들은 삼척부사, 삼척영장, 찰방의 자식이거나 형제 또는 집안의 친인척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더러 사사로운 관계의 지인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지역 출신 인물로 현재 확인되는 사람은 최돈창, 권필교, 김세갑, 홍재주, 민백조 등이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문인 조필감(趙弼鑑)[1767~?]은 1802년 그의 조카딸을 삼척 관아에 데려다 주는 것을 계기로 관동 지방의 명승지를 59일간 유람하고 『동행일기(東行日記)』를 쓴 인물로, 이 해에 삼척 죽서루에 그의 이름을 남겼다.
7. 기타 인물들의 이름은 모두 82건 90여 명이 조사되었다. 이들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조선시대 사람들로 추정이 된다. 이들 가운데 삼척도호부(三陟都護府) 소속 관기(官妓)로 추정되는 인물 6명의 이름[죽선(竹仙)·화선(花仙)·□향(□香)·진향(眞香)·원홍(元紅)·송월(松月) 등]이 새겨진 것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현재 기타 인물들의 신상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관련 문헌 자료가 한정되어 있어 그 실체는 파악할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삼척 죽서루와 오십천 주변 일대의 바위 및 절벽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암각자는 조선시대 여러 문인화가가 죽서루와 오십천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아 낸 것과 같이 시인, 묵객 등의 사대부뿐만 아니라 유림들이 죽서루의 빼어난 경관과 수려한 풍광에 흠뻑 매료되어 유람지로서 널리 애용하였음을 여실히 보여 주는 금석문 자료들이다. 우리 선인들이 남긴 발자취와 숨결이 깃들어 있어 역사문화 가치와 의미가 있다. 향후 명승으로서의 삼척 죽서루와 오십천 주변의 역사 및 문화 가치를 보존하고 활용하는데 의미있는 기초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