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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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夢亮 |
이칭/별칭 | 응명(應明),정헌(定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상현 |
출생 시기/일시 | 1499년 - 이몽량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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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564년 - 이몽량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04년 - 이몽량 신도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681년 - 이몽량 좌참찬 증직, 정헌 시호 받음 |
출생지 | 이몽량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
묘소|단소 | 이몽량 묘소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 관직 | 형조 판서 |
[정의]
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응명(應明). 고려 시대 대학자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공조 참판 이연손(李延孫)의 4세손이다. 아버지는 진사 이예신(李禮臣)이며, 아들은 선조 대의 명신 이항복(李恒福)이다.
[활동 사항]
이몽량(李夢亮)[1499~1564]은 1522년(중종 17)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1528년(중종 23) 형 이몽윤(李夢尹)과 함께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승정원 주서와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였다. 1539년(중종 34) 경상도 어사로 발탁되어 백성들의 농사 상황을 살폈다. 이후 사헌부의 지평과 장령 등에 제수되었다. 1544년(중종 39)에는 후릉 정자각 화재 사건을 조사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면서 위사공신(衛社功臣) 3등에 봉해졌다. 이어서 사간원 대사간으로서 임금의 마음을 닦는 도리와 치국에 대해 상차하였다. 1547년(명종 2)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며 조정에 보고하여 기민을 구제하였다. 이어 예조 참의·병조 참지·장례원 판결사 등을 두루 역임하고, 1550년(명종 5) 승정원 도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조식(曺植) 등 재야의 사림을 천거하였고, 이어서 청홍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54년(명종 9) 대사간에 임명되어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원하기 위해 임금이 해야 할 일을 상차하였다. 1557년(명종 12)에는 경기도 관찰사에 제수되어 도내 민정을 보고하였다. 이후 예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1560년(명종 15)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이어서 사헌부 대사헌·형조판서를 지냈는데, 형조의 책임자로 사형수의 질문[作文]을 잃어버린 일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으나 곧 서용되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와 한성부 판윤을 거쳐 1564년(명종 19) 의정부 우참찬에 이르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향년 66세로 사망하였다. 명종이 애도를 표하였다. 성품이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특히 형제간에 우의가 돈독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에 있다. 묘역에 1691년(숙종 17) 건립한 묘비가 있다.
[상훈과 추모]
1686년(숙종 12) 조정에서 정헌(定獻)이라는 시호와 함께 좌참찬(左參贊)을 증직하였다. 신도비는 1604년(선조 37년) 건립되었으며, 1860년(철종 11) 후손 이유원(李裕元)이 재건하였다. 비문은 최입(崔笠)이 지었고, 글씨는 한호(韓濩)가 썼으며, 노직(盧稙)이 전액(篆額)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