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12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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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Minister Ax, Won Doo Pyo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찬경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81년 6월 30일 - 「도끼정승 원두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1-4에 수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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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90년 8월 28일 - 「도끼정승 원두표」 김정수[남, 65]에게 채록 |
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2년 - 「도끼정승 원두표」 양주문화원에서 발행한 『양주군지』에 재수록 |
채록지 | 금곡동 -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
성격 | 인물 전설|사기담|명당 발복담 |
주요 등장 인물 | 원두표|국풍 |
모티프 유형 | 지관 속여 명당 얻기|명당 발복|글자 만들기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에 도끼정승 원두표와 관련하여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도끼정승 원두표」는 조선 후기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문신 원두표(元斗杓)[1593~1664]가 국풍을 속여 명당을 얻고 정승의 자리에 올랐다는 내용의 인물 전설이다.
원두표와 관련된 인물 전설은 죽은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 이야기와 인조반정(仁祖反正)[1623]에 가담하여 도끼로 대궐 문을 부순 이야기로 나뉘는데, 「도끼정승 원두표」는 죽은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확장되어 있다. 원두표는 인조반정 모의에 가담하였으며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 정사공신(靖社功臣)이 되었다. 원두표와 관련된 구전설화는 남양주 지역 외에도 경기도 여주군[현 경기도 여주시], 경기도 하남시, 경기도 성남시, 강원도 영월군, 강원도 양양군, 충청남도 예산군, 경상북도 군위군, 경상북도 봉화군 등에서 채록되어 『한국구비문학대계』를 통하여 전하여지고 있다.
[채록/수집 상황]
「도끼정승 원두표」는 1981년 6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1-4-의정부시·남양주군에 수록되어 있으며, 1992년 양주문화원에서 간행한 『양주군지』에도 재수록되었다. 디지털양주문화대전에도 동일한 자료가 등재되어 있다.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는 본래 경기도 양주군에 속하였던 지역이다. 1980년 4월 1일 경기도 양주군의 일부 지역이 남양주군으로 분리·독립되었으며, 남양주군은 1995년 1월 1일 미금시와 함께 남양주시로 통합되었다. 「도끼정승 원두표」는 1980년 8월 28일 경기도 남양주군 미금읍 금곡리[현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서 주민 김정수[남, 65]에게 채록한 것이며, 제보자가 경상북도 문경 지역에 거주할 때 들은 것이라고 한다.
[내용]
조선 시대에 원두표라는 사람이 있었다. 원두표와 원두표의 형은 모두 일자무식이었는데, 원두표는 배포가 컸다. 어느 날 나라의 묏자리를 잡는 풍수가(風水家)인 국풍(國風)이 원두표가 사는 지역을 지나가게 되었다. 국풍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전하여 들은 원두표는 국풍이 지나가는 때를 기다렸다가 말을 타고 오는 국풍을 잡아서 망태기에 넣어 강가의 버드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원두표가 국풍을 잡아 두면 원두표의 형이 국풍을 구하여 주기로 미리 모의하였다. 계획대로 원두표의 형이 나타나 국풍을 망태기에서 풀어 주었다. 원두표의 형은 시치미를 떼고 “어떤 놈이 이런 고얀 짓을 하였느냐?”라고 말하며 국풍을 집으로 데려가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국풍은 보답으로 가까이에 누구든 죽은 사람이 있다면 묏자리를 잡아 주겠다고 하였다. 이에 원두표의 형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나 가난한 형편으로 인하여 돈을 주고 묏자리를 잡지 못하고 문앞에 토롱(土壟)[흙을 모아 쌓아서 임시로 만든 무덤]을 만들어 가매장하였다고 하였다. 원두표의 형은 국풍에게 산에 묏자리를 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국풍은 원두표의 형과 함께 사방으로 산을 돌아다니다가 좋은 터를 발견하였다. 묏자리로 쓰면 정승이 꼭 나오게 되는 자리였다.
하관식 날 국풍은 자신을 곤궁에 빠트린 원두표가 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원두표는 국풍에게 다가가 인사하고 곤궁한 살림살이로 인하여 아버지의 묏자리를 잡지 못하여서 일을 꾸몄다고 모두 털어놓으며 용서를 빌었다. 국풍은 도로 묘를 파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알겠다고 하였다.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 이후 원두표는 도끼로 남대문을 부수고 정승의 자리에 올랐다. 조정의 정승들이 원두표의 언변이나 기세를 당하여 내지 못하고, 원두표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하여 춘추 제사의 축관(祝官)을 맡겼다. 원두표는 일자무식하니 축문을 읽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두표는 임금과 각 정승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천지가 진동하도록 큰 소리로 축문을 읽기 시작하였다. 임금이 원두표에게 왜 축문을 큰 소리로 읽는지 묻자, 원두표는 뭐라고 읽는지 잘 들리지도 않는 소리로 축문의 나머지를 읽었다. 원두표의 기를 꺾어 놓으려던 정승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어느 날은 중국에서 사신이 오게 되어, 원두표가 배웅을 갔다. 원두표는 일자무식이었지만 정승이었으므로 글씨를 잘 쓰는 수행원을 대동하여 갔다. 원두표가 말하면 수행원은 받아 적으면 되는 것이었다. 원두표가 말한 것은 ‘멱 일기’였다. 수행원이 ‘멱’ 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글자인지를 묻자 원두표는 ‘비빔밥 멱’ 자도 모르냐고 나무랐다. 중국에서 온 사신들도 ‘비빔밥 멱’ 자는 알지 못하는 글자였다. 수행원이 ‘비빔밥 멱’ 자를 쓰는 방법을 원두표에게 물었다. 원두표는 ‘밥 식(食)’ 변에 ‘섞을 석’을 합한 것이 곧 ‘비빔밥 멱’ 자라고 하였다. ‘비빔밥 멱’ 자는 원두표가 만들어 낸 글자이기에 옥편에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모티프 분석]
「도끼정승 원두표」의 주요 모티프는 ‘지관 속여 명당 얻기’, ‘명당 발복’, ‘글자 만들기’ 등이다. 「도끼정승 원두표」는 원두표에 관한 인물 전설인데, 사기담과 명당 발복담의 성격을 지닌다. 원두표는 형과 모의하여 지관을 속이고 명당으로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였으며, 그 결과 정승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또한 「도끼정승 원두표」에서 원두표는 일자무식한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무식함으로 인하여 창피를 당하지는 않는다. 조정의 정승들은 원두표의 일자무식함을 노려 기를 꺾어 놓으려 하였지만, 원두표가 ‘비빔밥 멱’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냄으로써 원두표의 언변과 기세는 다시 강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