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12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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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千鎰- 夫人 |
영어공식명칭 | Kim Cheon Il's Wife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 퇴계원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찬경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98년 4월 18일 - 「김천일의 부인」 백황봉[남, 88]에게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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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2000년 12월 - 「김천일의 부인」 남양주시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남양주시지』에 수록 |
관련 지명 | 남양주시 - 경기도 남양주시 |
채록지 | 퇴계원리 -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 퇴계원리 |
성격 | 민담|이인담 |
주요 등장 인물 | 김천일의 부인|김천일 |
모티프 유형 | 전쟁을 예견한 김천일의 부인 |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 퇴계원리에서 김천일의 부인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김천일의 부인」은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천일(金千鎰)[1537~1593]이 전쟁을 예견한 총명한 부인의 덕으로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동일한 내용의 이야기가 『청구야담(靑丘野談)』과 『계서야담(溪西野談)』에 실려 전한다. 김천일은 임진왜란(壬辰倭亂)[1592]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후 창의사(倡義使)의 군호를 받아 경기도까지 올라와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천일의 부인」은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 퇴계원리에서 구연되어 『남양주시지』에 수록된 것이다.
[채록/수집 상황]
「김천일의 부인」은 1998년 4월 18일 경기도 남양주시 퇴계원읍 퇴계원리 주민 백황봉[남, 88]에게 채록하였고, 2000년 12월 남양주시지편찬위원회에서 발행한 『남양주시지』에 수록되었다.
[내용]
김천일이 양씨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양씨는 매일 잠만 자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김천일의 아버지가 며느리를 불러 매일 잠만 자는 까닭을 물으니, 양씨는 할 일이 없으니 잠만 잔다고 대답하였다. 김천일의 아버지가 양씨에게 일을 시키겠다고 말하자, 양씨는 종 스무 명을 주면 무주(茂朱)로 가서 일을 하겠다고 하였다. 양씨는 종들을 데리고 무주의 산골짜기로 들어가 박을 경작하였다. 박이 다 자랐을 때 양씨는 박속을 모두 빼내고 옻칠을 하여 쇳덩어리처럼 보이도록 바가지를 만들고 끈을 매달았다. 김천일의 군사들은 양씨가 만든 바가지를 하나씩 허리에 차고 전쟁에 나가서, 쇳덩어리처럼 만든 바가지를 드문드문 떨어뜨려 놓고 왔다. 일본군은 그 쇳덩어리를 확인하고는 김천일이 이끄는 군대는 모두 무거운 쇳덩어리를 허리에 차고서 종횡무진한다고 여겨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고 한다.
김천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북쪽으로 출병하였고, 수원에서 본격적인 군사 활동을 펼치며 큰 공을 세웠다. 이후 김천일은 강화도로 진을 옮겼으며, 창의사의 군호를 받았다. 김천일의 총명한 부인에 관한 이야기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야담집인 『청구야담』과 『계서야담』, 『기문총화(記聞叢話)』 등에서 발견된다. 문헌에 수록된 이야기와 비교하면 『남양주시지』에 수록된 「김천일의 부인」은 대폭 축소된 형태를 보이며 세부적인 설정에서도 차이가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청구야담』에는 김천일의 부인 이야기가 「창의사뇌양처성명(倡義使賴良妻成名)[창의사 김천일이 훌륭한 처의 힘으로 이름을 떨치다]」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김천일의 부인」과 비교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청구야담』에서는 김천일의 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일을 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김천일의 부인이 먼저 치산(治産)에 대한 뜻을 밝힌다. 또 김천일의 부인이 종을 데리고 무주로 들어가 박을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 밖에 있는 밭에 호박을 경작한다. 시아버지의 질문에 김천일의 부인이 치산을 하려 하여도 밑천이 없다고 이야기하자, 시아버지는 곡식 30여 포와 노비 네다섯 명, 소 몇 마리를 내어 준다. 이에 김천일의 부인은 노비들로 하여금 소에 곡식을 싣고 무주의 깊은 계곡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도록 한다. 그러는 한편 김천일에게는 장기의 갖가지 묘수를 가르쳐 이생과의 장기 내기에서 이겨 노적가리를 얻어 오도록 하고, 그렇게 얻어 온 재물을 곤궁한 자들을 구제하고 뛰어난 이들과 교제하는 데 사용하게 한다. 이후 김천일의 부인은 밭을 갈아서 호박을 경작하는데, 매년 호박이 익으면 옻칠을 하게 하여 창고를 채우고 호박 모양으로 만든 쇠를 그 옆에 나란히 두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의 부인은 김천일로 하여금 김천일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키도록 하고 노비들을 보낸 무주를 피난처로 삼도록 한다. 이후 김천일의 군사들이 옻칠을 한 호박을 이용하여 왜적을 달아나게 하였다는 내용은 「김천일의 부인」과 동일하게 전개되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이처럼 「김천일의 부인」에는 김천일의 부인이 훗날 김천일이 의병을 모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이야기가 없으며, 두 종류의 바가지를 준비하는 시기 이후 임진왜란이 발발하기까지의 시간적인 흐름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다.
[모티프 분석]
「김천일의 부인」의 주요 모티프는 ‘전쟁을 예견한 김천일의 부인’이다. 김천일의 부인이 무주의 산골짜기로 들어가 박을 심은 것은 일본군을 물러나게 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다. 김천일의 부인이 이후 발생할 전쟁을 예견하였음을 암시한다. 「김천일의 부인」은 현자이자 이인의 면모를 지닌 ‘김천일의 부인’의 활약을 담고 있는 이인담(異人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