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9004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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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
영어공식명칭 | the Imjin War |
이칭/별칭 | 임진란,임진전쟁,조일전쟁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한신 |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하여 경기도 남양주 지역을 포함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개설]
1592년 4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이래 조선은 연전연패를 거듭하였으나, 1593년 1월 이후로 명과의 연합 작전을 통해 일본군에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 1593년 4월 일본군이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 일대에 후퇴하기 전까지 조선 조정에서는 도성(都城)인 한성(漢城)을 수복하기 위해 경기도 동부 및 서부 일대에서 일본군을 압박하였다. 그중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를 포함하는 경기도 양주목(楊州牧)에서는 유성룡(柳成龍)이 이시언(李時言), 고언백(高彦伯), 정희현(鄭希玄), 박명현(朴名賢) 등을 지휘하여 일본군과의 교전하였다. 1593년 4월 일본군이 동래도호부 일대에 후퇴한 이후에 조선 조정은 지역별 군비 강화를 시행하였고, 양주목 지역은 경기도 가평군(加平郡) 등과 함께 경기 후사(後司)에 편입되어 일본의 재침에 대비하는 방어 거점이 되었다.
[전쟁 발발 직후 유격전의 전개와 후방 교란]
일본군은 1592년 4월 13일 부산포(釜山浦)[현 부산광역시 동구]에 상륙하여 조선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1592년 4월 28일 충청북도 충주(忠州)를 점령하고, 1592년 5월 3일 도성인 한성에 입성하였다. 조선 조정은 1592년 4월 30일 파천(播遷)하기 시작하여 1592년 5월 1일에 경기도 개성(開城)을 거쳐, 1592년 6월 22일에 평안도 의주(義州)에 도착하였다. 조선 조정은 전국의 관군과 사대부(士大夫)에 근왕(勤王)과 항전을 명령하는 한편 명 측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일본군은 1592년 5월 3일 제1번대(番隊)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사와 제2번대인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군사가 한성에 입성하였다.
이에 1592년 5월부터 관군과 의병이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기 시작하였으며, 경기도 지역에서는 심대(沈岱)가 경기감사에 임명되어 경기도 파주(坡州)와 양주 일대에서 한성을 수복하기 위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심대는 양주목사(楊州牧使) 고언백에게 서로병마(西路兵馬)를 지휘하게 하는 등 경기도의 군사 동원 및 운용에 힘썼으나 1592년 10월 삭녕(朔寧)[현 경기도 연천군과 강원도 철원군 지역의 옛 지명]에서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이후 경기도 일원은 양주목사 고언백이 수시로 한성 일대에서 활동하는 일본군을 기습하며 정찰·교란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1592년 5월 중순 경기도 양주의 해유령(蟹踰嶺)에서 조선군과 일본군의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1592년 5월 10일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제2번대가 선발대로서 한양을 출발해 경기도 파주를 거쳐 임진강 유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배를 구하지 못하자 일본군은 임진강 유역에 머무르며 도하 준비에 나섰다. 이 시기 부원수 신각(申恪)은 한 무리의 일본군이 경기도 파주에서 경기도 양주 방면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서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으로 향하는 길이 지나는 게너미고개, 즉 해유령 일대로 병력을 은밀히 이동시킨 후 1592년 5월 16일 일본군이 접근해 오자 고개 양쪽에 매복해 있다가 기습을 가하여 일본군을 패퇴시키고 7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때 인천부사 이시언이 돌격장으로서 전공을 세웠다.
1592년 6월에는 남한강 마탄(馬灘)에서 승전이 있었다. 여주목사 겸 강원도조방장인 원호(元豪)는 경기도 여주목 구미포에서부터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던 중 마탄 일대에 일본군이 출몰하여 방화 및 약탈을 자행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원호는 이를 이천부사(利川府使) 변응성(邊應星)에게 알리고 양측의 군사로 합동 작전을 펼치기로 약속하였다. 원호와 변응성은 선박 하나를 구하여 군사를 태운 후 짐 싣는 배인 것처럼 위장하여 마탄으로 향하였다. 일본군이 조선군의 배를 약탈하기 위해 정박을 명하였을 때, 배 안의 조선군은 강변에 접근하자마자 일본군을 사살(射殺)하였다. 변응성의 군사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소탕하였다. 일본군은 마탄 전투의 패전으로 한성에서 강원도 원주로 통하는 보급선이 끊어져 충청북도 충주에서만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 측에서는 경기도 여주·이천·양근[현 경기도 양평군 양평읍·강상면·강하면·옥천면·양서면·서종면,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일대]·양주 일대의 조선 백성을 보전할 수 있었다.
조선 측에서는 전쟁 국면의 반전을 시도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명 측에 원군을 요청하여 1592년 7월 부총병 조승훈(祖承訓)이 지휘하는 명군이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조승훈의 공격은 실패하였으나 1593년 1월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지휘하는 명군이 평양성을 재차 공격하여 평양성을 수복하였고,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기세를 몰아 개성을 수복하고 한성 공략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1593년 1월 27일 이여송의 부대는 벽제관(碧蹄館)[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일대]에서 일본군이 기습을 받아 패전하였다. 이여송의 부장 사대수와 고언백의 기병 3,000여 명이 여석령에 주둔하고 있는 고바야가와[小早川] 군의 부장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군을 공격하였으나, 지형의 불리함으로 인해 이여송의 기병은 현재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일대인 주막리(酒幕里)에서 고바야가와 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군사가 사상을 당하였다. 그 결과 이여송은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벽제관과 혜음령(惠陰嶺)[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과 파주시 광탄면을 잇는 고개]을 거쳐 경기도 파주로 후퇴하였다.
조선군 지휘부에서는 이여송에게 한성 공략을 주장하였으나, 명군 지휘부에서는 더 이상의 전진과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에 경기·황해 지역 도체찰사 유성룡은 명군을 계속 설득하는 한편, 조선군을 결집하여 한성 주변에서 일본군에 유격전을 벌였다. 유성룡은 당장 자신이 직접 지휘 가능한 고언백·이시언·정희현·박명현 등 장수들을 결집하여 전략적으로 방어와 공격이 가능한 지점에 배치하고, 이들을 통해 때로 일본군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고언백의 경우 휘하 군사들을 정탐·정보 수집 활동에 지속적으로 투입하고 있었고, 각종 국지전에 적극적으로 임하며 매번 유성룡에게 결과 보고를 하고 있었다. 황해좌방어사 이시언은 평양성 회복 이후 유성룡의 추격 명령에 따라 양주목사 고언백과 함께 상하에서 합동 작전을 벌였던 경험을 계속하여 겸삼도방어사로서 이후에도 함께 활동하였다. 박명현과 정희현은 유성룡의 명령으로 함경도의 일본군이 남하하는 것을 견제하러 갔다가, 1593년 3월부터 경기 지역에 투입되어 주로 고언백 측의 작전 수행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았다. 대개 평양성 회복을 전후로 유성룡의 지휘에 따라 전투를 수행하였던 장수들이었다.
고언백 등이 중점적으로 투입한 지점은 지금의 남양주 지역이 포함된 경기도 양주 일대 지역이었다. 주력군은 전투 경험이 많은 고언백의 부대였다. 양주 지역에서는 함경도에서 경기도 연천(漣川), 적성(積城)[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으로 들어와 도성으로 진입하는 일본군을 일부 차단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양주를 장악함으로써 도성의 동북쪽 일대에 출몰하는 일본군의 움직임을 억제하는 일도 가능하였다. 양주 장악은 경기 이동(以東) 권역을 조선군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한 포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비슷한 이유에서 유성룡은 용진(龍津)[현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지역]의 방어도 중시하였다. 용진을 지킬 수 있어야 경기도 양근·여주 및 강원도 춘천·원주까지도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기도 양주와 경기도 용진을 잇는 종축(縱軸)의 전선은 일본군 후퇴 시 경기 남동부와 강원도로의 침투 가능성을 저지한다는 데에 주요한 목적이 있었다.
1593년 3월 말 고언백·이시언 등이 경기도 양주·포천 등지에서 몇 차례의 유격전을 치렀고, 일본군의 전투력 약화가 관찰되기 시작하였다. 노원과 동소문 부근에서 일본군을 패주시키고, 비슷한 시기에 도성의 서부 지역인 외성산(外城山)에서도 유리한 전투를 벌였다. 교전 지역도 경기도 양주·벽제관 등지로부터 도성 근접 지역으로 한층 가까워지고 동서 양쪽으로 압박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러나 명군 지휘부에서는 교전이 아닌 교섭으로 1593년 4월 일본군을 한성에서 철수시켰다. 일본군은 동래도호부 일대로 후퇴하여 진영을 구축하였다.
[강화 교섭기 군비 강화]
1593년 명군 지휘부는 일본군이 동래도호부 일대로 후퇴한 이후 본격적인 강화 교섭 논의를 시작하였다. 송응창은 휘하에 소속된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을 임시로 명의 사절이라 칭하고 일본으로 보냈다. 명 측에서 보면 전쟁을 하루 빨리 종결지어야 하였고, 명의 인력과 물자를 아끼기 위해서는 강화 교섭이 적절한 방법이었다. 송응창은 조선 조정에도 일본과의 강화 교섭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권도(權道)’로써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명군 지휘부의 요청에 대응해야 한다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권도란 원칙과 법을 고수하는 경상(經常)의 반대말로 임시방편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의미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주문(奏文)·자문(咨文) 등 외교 문서를 작성하여 표면적으로 강화를 배척하지만, 명 조정에서 이를 추진한다면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내용을 전달하였다. 그 결과 1594년 9월 이후로 조선은 명과 일본의 강화 교섭 논의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 시기를 자강(自强)을 위한 군비 강화의 시기로 활용하였다. 그중 핵심적으로 방어해야 할 지역으로 고려한 곳이 경기도였다. 경기도를 방어하여 궁극적으로 도성인 한성을 방어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조정에서는 유성룡이 경기 방어의 대강을 구상하였다. 1593년 10월 영의정에 임명된 유성룡은 1592년(선조 25) 일본군이 신속하게 북상할 수 있는 경로를 신중히 관찰하였다.
이에 1593년부터 경기도 여주·이천에서 경기도 지평[현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양근을 거쳐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여기에 대한 방비를 해야 할 필요성을 건의하였다. 경기 지역에서 좀 더 구체적인 거점의 확정과 그에 따른 방어권역의 고려, 군사 배치 및 이동 계획 등은 1595년(선조 28) 이후 제기되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재침 예상 경로 중 가장 유력한 경로에 군사와 군량을 배치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유성룡은 1안으로 경기도 여주·이천~경기도 용진 방어 계획을, 2안으로 경기도 안성~경기도 수원·광주(廣州) 방어 계획을 구상하였다. 주요한 방어 거점은 경기 동남 지역에서는 경기도 용진 및 파사성[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과 남한산성, 경기 서남 지역에서는 경기도 수원의 독성(禿城)[현 경기도 오산시 지곶동]이었다. 경기도 양근[파사성]·광주·이천·수원 등을 구체적으로 거점으로 지목하고, 거점 간 상호 방어망을 구성하여 한성을 지키는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경기도 양주의 군비 강화는 주로 경좌영(京左營)의 설치와 관련이 있다. 유성룡이 전략적인 가치를 중시한 지역은 경좌영이었다. 경좌영은 고니시가가 침공한 경로인 경기의 동남부 지역이었고, 재침 시 한강 상류 지역에서 차단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이다. 경좌영의 경기도 용진에서 경기도 이천을 전사(前司), 경기도 여주를 좌사(左司), 경기도 지평과 경기도 양근을 중사(中司)로 놓아 한강 상류[현 충청북도 충주와 경기도 이천 지역]에서 경기도 용진에 이르는 경로의 방어 능력을 강화시키고, 연락 및 협동 작전이 가능한 조건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경기도 광주를 우사(右司), 경기도 양주·가평 등을 후사(後司)로 하여 경기도 용진·이천·여주 일대를 후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파사성은 1595년부터 승려인 도총섭 의엄(義嚴)이 공사를 감독하여, 경기도 수원의 독성과 함께 1597년 3월에 대략 공사를 완료하였다. 파사성 방어는 승장 의엄이 담당하고 있었으나, 이후 수성장 김수남을 보내 방어를 강화하였다. 1597년경에는 용진성의 공사도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용진성은 토성으로 축조되었으며, 사도도체찰사(四道都體察使) 유성룡이 직접 공사를 감독하였다. 경기 좌방어사 변응성은 1594년부터 파사성에 둔전을 조성하여 백성을 안집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이렇듯 경기도 오늘날 남양주시를 포함하는 양주 지역은 경기도 광주·파주 등 지역과 경계를 맞대고 있었고, 경좌영의 일익으로서 전략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