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15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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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書堂 |
영어음역 | seodang |
영어의미역 | village school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
시대 | 조선/조선,근대/근대 |
집필자 | 유호석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 사설 초등 교육기관.
[개설]
서당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초등 교육기관으로 마을마다 설치되어 어린 아이들의 교육을 담당하였다. 서당의 기원은 멀리는 고구려의 경당(扃堂)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그 존재가 확인되지만 크게 번창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였다.
서당은 처음에는 양반 가문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18세기 후반에 들어와 평민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어린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서당은 비록 사설로 운영되는 초등 교육기관이었지만 향촌 사회에서 백성들에게 문자를 보급하고 마을의 풍속을 교화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변천]
남원 지역에서도 구한말까지는 각 마을에 서당이 최소한 하나씩은 설립되어 있었으며, 일본이 무단으로 조선을 침탈한 이후에도 계속 존립되었고 일부는 해방 후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마을의 주요 문중을 중심으로 설립 운영되었으며, 유명 훈장을 초빙하여 학동들을 가르쳤다. 그런가 하면 관리의 자제와 일반 서민의 자녀들이 각각 수학하는 형태의 관서당(官書堂)이 읍성의 안팎에 설치되어 운영되기도 하였다.
또한 남원은 도호부가 설치되었던 고도(古都)로 많은 유학자를 배출한 곳이었던 만큼 유명한 유학자들이 잠시 터를 잡고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한말의 거유(巨儒) 송병선이 머물렀던 염수재가 있으며,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초대 훈장으로 기거하면서 20여 년 간 후학을 양성했던 대강면 사석리의 송사재가 있고, 사계 방응현이 독서실로 창건하면서 시작되었던 주생면 영천리의 사계정사가 있다.
그러나 해방 후 공교육 기관이 자리잡으면서 서당은 역사의 뒷편으로 물러났다. 남원 지역의 옛 서당은 오늘날 그 자취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남아 있는 경우에도 재실(齋室)이나 정사(精舍)의 형태로 건물의 일부가 남아 있을 뿐, 한문 전문 교육기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곳은 없다.
[운영 형태]
서당 운영의 형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고급 관료가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돌아가 개인적으로 서당을 설립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사매면 화정리에 있는 구경재는 호조좌랑 출신의 황종묵이 초창기에 서당을 운영하였다.
둘째, 마을의 특정한 문중이 주도하거나 또는 촌락 공동체에서 함께 힘을 모아 외부에서 훈장을 초빙하든지 마을 내에서 학식이 높은 사람을 훈장으로 모시고 자발적으로 서당을 설립하는 경우가 있었다.
장수황씨 문중에서 관리했던 대산면 죽곡리의 죽곡서당, 삭녕최씨 문중에서 그 재실(齋室)에 설립 운영하였던 이백면 효기리의 고암재, 순흥안씨와 남원양씨 등 양가의 문중에서 공동으로 운영하였던 이백면 내동리의 내동서당, 전주최씨 문중에서 관리했던 산동면 부절리의 화수재 등이 대표적이다.
셋째, 유학자 개인의 조그마한 서당으로 시작된 경우가 있었다. 대산면 금성리의 동호재, 대강면 평촌리의 평촌서당, 대강면 방동리의 방동서당 등이 이에 속한다. 이같은 서당 가운데 상당수는 나중에 마을의 유지들과 공동으로 운영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교육내용]
남원 지역에서의 서당 교육도 다른 지역의 서당 교육과 다를 바 없어 강독(講讀), 제술(製述), 습자(習字) 등으로 이루어졌다. 강독의 교재는 『천자문』·『동몽선습(童蒙先習)』·『자치통감(自治通鑑)』·사서삼경(四書三經)·『사기(史記)』·『당송문(唐宋文)』·『당률(唐律)』 등이었으며, 때로는 『춘추(春秋)』·『예기(禮記)』·『근사록(近思錄)』도 교재로 사용되었다.
제술(製述)은 오언절구(五言絶句)·칠언절구(七言絶句)·사율(四律)·고풍(古風十八句詩)·작문 등을 가르쳤는데, 훈장의 자질에 따라 제술을 전혀 가르치지 않는 곳도 있었다. 습자는 해서(楷書)를 위주로 하였으나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익히기도 하였다.
[현황]
남원에 설립된 서당에 대한 정확한 통계 자료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또한 조선시대 또는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서당으로 현존하는 서당은 거의 없다. 그러나 『남원지(南原誌)』(1992)에 수록된 유명 서당의 숫자만 해도 48개소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서당이 존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서당의 이름과 설립 연대 또는 시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엄계서당(1615)·사계정사(1682)·고암재(1726)·고정재(1740)·덕양재(1750)·열악재(1757)·구경재(1775)·옥산재(1790)·방동서당(1800)·청룡재(1810)·내촌서당(1817)·진목서재(1827)·관서당(1830)·독서당(1840)·침류당(1843)·등동재(1860)·남창재(1870)·죽곡서당(1880)·비촌서당(1880)·임리서당(1890)·진덕재(1890)·병암재(1890)·신흥서당(1894)·양동서당(1903)·서무리서당(1903)·강석서당(1905)·동호재(1905)·내동서당(1908)·권포서당(1910)·신명의숙(1910)·염수재(1910)·송사재(1920)·풍촌서당(1920)·화수재(1920)·광동서당(1920)·요양재(1920)·학산재(1921)·학이재(1923)·양정재(1925)·평촌서당(1930)·관동재(1935)·양진재(1945)·구사재(1960)·명륜화락당(조선 중기)·황죽서재·운곡재(조선 중기)·서당리서당(조선 중기)·최락당(영조 중기)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