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501 |
---|---|
한자 | 下牛里 |
영어음역 | Hau Maeul |
영어의미역 | Hau Village |
이칭/별칭 | 하우마을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상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석홍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에 속하는 상우리를 관할하는 행정리.
[개설]
하우리는 법정리 상우리가 2개 행정리, 즉 상우리와 하우리로 나뉘어 생기게 되었다. 인월면에서 지리산 방향으로 500m 가량 떨어져 있고, 마을 앞을 지나는 지방도 1084호선은 지리산 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특히 특산물 전시판매장이 마을 앞에 있다.
마을에는 이러한 일화가 있다. 마을 입구에 거대한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도망하였다. 그 나무가 어찌나 컸던지 지금도 나무뿌리의 흔적이 최근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당시 나무뿌리는 500m나 뻗었다고 전한다.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던 느티나무가 사라지자 와우형으로 생긴 마을이 그늘을 잃어 몰락 위기에 놓였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 약 50년 전 그 자리에 다시 정자나무를 심었더니 마을이 부흥했다고 한다.
[명칭유래]
1820년대(순조 20) 동복오씨(同福吳氏) 중 은암거사(隱庵居士)가 이 곳에 터를 잡아 자손들이 정착하고, 그 후 김해김씨 등 여러 씨족이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상우리와 같이 약 160년 전 은암거사가 은거하였으므로 ‘은마을[隱里]’이라 불러오다가 마을의 지형이 누워 있는 소, 즉 와우(蝸牛)형으로 생겼다 하여 이름을 와우리로 바꾸었다. 후에 행정구역을 분리함에 따라 윗마을, 아랫마을로 나누어지면서 아랫마을인 이곳은 하우리가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은마을’의 이름을 사용하기도 한다.
‘소근리’ 또는 ‘속은리’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은거한다는 은마을을 소리나는 대로 표현한 것이므로, 상우리는 일명 ‘웃소근’ 또는 ‘상속은’이란 의미가 된다. 한편으로 ‘은거한다’는 뜻을 가진 ‘웃소근’을 한자로 표기하자면 상은리(上隱里)로 표기해야 옳을 듯한데 상우(上牛)로 표기하였다.
이는 마을터가 와우형국이라 소가 앉은 자리란 뜻의 ‘소구니’ 또는 ‘소근’에서 유래하여 소근은 ‘우리(牛里)’의 뜻이므로 ‘웃소구니’를 ‘상우(上牛)’로 표기한 것으로 짐작된다. 혹은 속된 것이 숨었다는 ‘속은리(俗隱里)’나, 임진왜란 때 함양에 대군, 중군리에 중군, 이곳에 소군이 주둔했다고 해서 ‘소군리’로 불렸다고도 한다.
[형성 및 변천]
본래 운봉군 동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상우리·중우리·하우리를 병합하여 상우리로 통칭해서 남원군 동면에 편입하였다. 상우리의 자연 마을로는 소근이(속은리·상우리·웃속은이), 중속은이(중우), 아랫속은이(하우) 등이 있다.
산세가 험하여 농경지가 적으며 그 나마 천수답이 대부분이어서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1940년경에 소류지를 축조함으로써 관개가 호전되어 소득을 보장하게 되어 빈집 많기로 이름난 마을에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며 마을이 윤택해졌다.
1972년부터 새마을 사업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마을 안쪽의 많은 돌을 이용하여 마을 안길을 확장하고, 돌로 담장을 쌓아 마을 환경을 정리하였다. 또한 회관·창고·간이 급수 시설 등 여러 시설을 신축함으로써 문화 농촌 마을로 변모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자연환경]
마을 앞에는 남천이 흐르고, 뒤로는 3개 봉우리의 삼봉산이 막아주어 아늑한 느낌이 든다. 지리산 지맥이 세진암의 주봉인 1,073m의 서룡산(瑞龍山) 북서쪽 기슭을 완만히 타고 내려와 마을 터에 와우형국의 지기(地氣)를 모아놓았다. 그래서 마을이 번창하려면 마을 저수지에는 항상 물이 가득해야 한다고 전해온다.
또 마을 인근에는 괭이바위가 있는데 원래는 범바위였다고 한다. 범바위가 있는 한 와우형국인 마을이 범에게 잡아먹히는 형국이 되어 망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1988년을 전후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요절하자 범바위를 괭이바위로 바꾸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마을이 배가 정박해 있는 형국이라 언젠가 배가 출항해야 마을이 발복하여 번창한다고도 말한다.
[현황]
마을 전체의 면적은 97.3㏊이고,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48세대에 104명이 살고 있는데, 이중 남자가 50명, 여자가 54명이다. 마을 사람들은 대대로 기후와 토질에 맞는 밤·감 등 유실수를 심고, 고랭지 여름 채소를 재배하는 등 소득 증대에 노력해왔다.
1974년도에 대대적으로 농토 확장 작업을 실시하고, 공한지를 개간하여 고랭지 채소를 재배함으로써 높은 농가 소득을 올려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다. 이제는 운봉 4개 읍·면에서 제일가는 채소 생산 마을이기도 하다.
또한 자체에서 원예조합을 구성하여 종자계량, 농약, 비료 등을 공동 구입하고, 생산된 채소를 공동 판매함으로써 마을 주민들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모범적 자립 마을을 이루었다.
1984~86년까지 마을 남쪽에 농공단지가 만들어지면서 영우냉동식품(주)·아영목공예·대립공예 등의 공장에서 각종 냉동식품과 상이나 목공예품을 생산하고 있다. 상이나 목기를 만드는 공장이 하나둘씩 마을에 들어와 목공예 마을로 부각되었으며, 남원시 토산품 및 농산물 전시장으로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