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4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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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就岩里 |
영어음역 | Chwiam-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취암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석홍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취암리는 인월면 소재지에서 군도 25호선인 유곡선을 따라 2㎞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명칭유래]
1530년(중종 25) 양성지(梁誠之)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기 위해 전국의 산세 지형을 살피고 다닐 때 이곳 취암리에 당도하였을 때의 일이다. 마을을 둘러보니 둘레의 산세가 새집처럼 생겼는데 그 중앙에 독수리 모양의 큰 바위가 있으므로 ‘독수리 취(鷲)’자를 넣어 취암(鷲岩)이라 칭하게 되었다 한다.
그후 마을 건너편에 있는 계암(鷄岩)마을에 닭바위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젊어서 요절하는 사고가 빈번하자 독수리 취자를 ‘따를 취(就)’자로 고쳐 취암(就岩)으로 하였다.
[형성 및 변천]
고려 말기 왜구의 빈번한 침입을 막기 위해 1366년(공민왕 15) 조정에서는 김일(金逸)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왜구 침입을 항의하는 한편, 그 중지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 막부의 무례한 행동으로 교섭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일은 면목이 없어 조정에 들어서지 못하고 전국 각지를 방랑하다 1390년경 이곳에 정착하고 몸을 피하니, 그후로 후손들이 대대로 이곳을 개척하며 마을을 이루었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최초로 이 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사람은 최씨였다고 한다. 그런데 최씨는 매라서 수리 형국인 취암마을에서는 기를 펴지 못해 떠났다고 한다.
그후 임진왜란 때 송동면 두곡리에서 경주김씨 삼형제가 피난을 왔다. 난이 끝난 후 큰형은 송동면 두락리 본터로 돌아가고, 둘째가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당시의 일본 기록에 따르면 이때까지 이 마을의 이름은 구평과 용암, 그리고 자래리 일부가 병합되어 용암리(龍岩里)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1914년 이후 마을 사람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 마을에서 500m 떨어진 곳을 선정하여 독립가구 20동을 이주시킴으로써 인월면 제일의 큰 마을이 되었다. 1975년에 마을 자비로 회관을 건립하고, 초가집을 모두 기와집으로 개량하였다. 1995년 시·군 통합으로 남원시 동면 취암리로 되었다.
[자연환경]
풍수지리적으로 취암 마을은 수리가 날개를 펴고 마을을 감싸 안은 형국으로, 인근에서 보기 드문 길지라고 전해 왔다. 수리바위가 있는 집터에서 과거 천석꾼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금산김씨 김택현(金澤鉉)이라고 한다.
김택현은 덕과면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이주하여 수리바위 밑에다 터를 잡았는데, 사랑채 터에 개축을 하고 나서 발복하였다. 인품도 후하여 죽었을 때 상여 행렬이 황산 모퉁이까지 뻗쳤다고 전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집터를 날개를 편 수리의 최고 혈인 머리 부분, 즉 눈과 입에 해당한다고 믿었다. 수리는 용맹스럽고 먹이를 잘 취해 재물 걱정은 없으나 아직 인물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수리봉 위 골짜기에는 벼가마니를 쌓은 형태의 노적바위가 있다. 그 바위 밑에 움푹 패인 곳이 있는데 그곳이 이 마을 명당터의 문이라고 한다. 그곳을 메우면 문을 닫는 꼴이 되어 성산이 흥하고 열면 복이 들어와 취암이 흥하다는 말이 있어, 30여 년 전까지도 인근 지역 사람끼리 열고 닫는 풍수 싸움이 심하였다고 한다.
[현황]
취암리의 면적은 2.32㎢,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94세대, 216명(남자 105명, 여자 11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 소득원은 농림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