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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487
한자 草村里
영어음역 Chocho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소강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법정리
면적 4.31㎢
총인구(남, 여) 274명(남자 144명, 여자 130명)[2014년 12월 31일 기준]
가구수 123세대[2014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유래]

본래 오촌리는 자래울 또는 오촌이라 하였다. 부친의 묘를 쓰기 위해 마을 앞 당산의 땅을 파던 연안이씨는 땅속에서 바위가 나오자 그 바위를 깨뜨렸다. 그러자 바위 속에서 자라 한 마리가 기어 나온 후 물이 솟았다고 한다.

연안이씨는 묘를 다른 자리로 옮기고 물이 솟은 자리에 우물을 만들었다. 이러한 연유로 자라가 나와 자라울, 자래울, 오촌(鰲村)으로 불렀는데, 지명을 한자로 옮기면서 ‘자라 오(鰲)’를 ‘다섯 오(五)’로 바꾸어 오촌(五村)이라 하였다.

초동리는 본래 주변이 푸르고 물이 맑아 ‘푸르리’라 불렀으나 지명을 한자로 옮기면서 풀 초(草)를 써서 초동(草洞)이 되었다. 초촌리초동과 오촌의 이름을 딴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형성 및 변천]

오촌리는 삼국시대 백제 관할이었던 초리 혹은 터서리라는 마을이 무동산(舞童山) 동쪽을 중심으로 있었으나 서기 660년 신라의 삼국 통일로 백제가 멸망하자 초리에 살던 백제 유민들은 망국의 한을 달래며 뿔뿔이 흩어져 옛 마을은 없어지고 현재는 농경지인 서당들 또는 터서리들로 변했다고 한다.

현재 오촌리는 1637년 병자호란 때 연안이씨가 난을 피하여 삼남의 요지인 남원에 당도하여 정착지를 물색하다 요천(蓼川)을 건너 장백산 자락에 위치한 현재의 오촌리에 도달해 보니 천혜의 요충지라 하여 정착지로 삼았다. 그 후 진주소씨와 남원양씨가 합세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본래 남원군 백암면 오촌리 지역으로 오곡, 자래울 또는 오촌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백암면의 오촌리 일부가 백암면 초동리에 병합되어 초동과 오촌의 이름을 따서 초촌리라 하고 초촌리에 편입되었다.

초동리는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영천이씨 충절공과 한양조씨 산서공이 양병을 모아 거병할 때 영천이씨는 장백산에, 한양조씨는 여원치(女院峙)에 포진하여 합동 작전으로 운봉을 거쳐 백암방을 침공하는 왜적을 물리쳤다.

그 후 이곳이 동으로는 장백산[455m], 남으로는 궁장동, 서로는 교룡산(蛟龍山), 북으로는 무동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자연 요충지로 최상의 피난지요, 명당 터라 믿고 영천이씨 일가친척을 비롯한 휘하 의병들과 함께 이곳에 남아 마을을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래 남원군 백암면 초동리 지역으로 푸르리 또는 초동이라 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백암면의 오촌리 일부가 병합되어 초동과 오촌의 이름을 따서 초촌리라 하고 초촌리에 편입되었다.

[자연환경]

동쪽으로 장백산, 남서쪽으로 무동산이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백암천이 길게 흐른다.

[현황]

2007년 기준 면적은 4.31㎢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123세대에 274명(남자 144명, 여자 13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남원시에서 동쪽으로 5㎞ 지점에 위치하며 군도 15호선에서 1㎞ 떨어진 곳에 있는 마을이다.

2014년 12월 31일 현재 오촌리는 총 66세대에 13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전체 면적 2.26㎢ 중 밭이 0.14㎢, 논이 0.49㎢, 임야가 1.40㎢, 기타 0.23㎢를 나타낸다. 초동리는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57세대에 13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전체 면적 2.05㎢ 중 밭이 0.14㎢, 논이 0.40㎢, 임야 가 1.30㎢, 기타 0.21㎢를 나타낸다.

자연 마을로는 까끔꼴, 양지뜸, 자래을 등이 있다. 까끔골은 초동리 남쪽이 되는 마을로 말림갓(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금한 땅이나 산)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지뜸은 초동리의 양지 쪽이 되는 마을을 가리킨다.

초동리 뒷산인 장백산에는 의병장 이춘절이 사용했던 봉화대 터가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장기를 게양했다 하여 마을 청년들이 파괴해 버렸다고 한다. 초촌리 산 211-1에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시 이백면 지역에서 공비 토벌로 산화한 51위 호국 영령의 넋을 추모하고 그 얼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1978년 4월 15일 건립된 충혼비가 있다.

무동산 주변에는 백제의 고분이 산재하고 있어 1979년 문화재 개발국 조사단에 의해 조사, 발굴되어 현재 초촌리 고분군으로 이름하여 지방기념물 제47호로 보존, 보호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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