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4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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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中基里 |
영어음역 | Junggi Maeul |
영어의미역 | Junggi Villag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서정섭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에 속하는 대정리를 관할하는 행정리.
[명칭유래]
사방이 병풍을 둘러놓은 것처럼 높은 산으로 포위되어 있고, 그 가운데 마을 터가 있다 하여 ‘가운데 중(中)’자와 ‘터 기(基)’자를 써서 중기리라 하였다. 또 마을 터가 중앙의 길지라 해서 중기라 하였다고도 한다. 예로부터 중터라고 불렀다. 마을이 번창하여 세대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또 위아래로 뜸이 생긴 후로는 상중기(上中基) 등 두 개로 나뉘어 윗마을, 아랫마을이 되었다.
[형성 및 변천]
1600년경 남원양씨(南原梁氏) 양정원(梁廷源)이 임진왜란을 피하여 함양에서 지리산으로 가던 중 이곳에 터를 잡아 정착한 후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 후 상중기에 몇 세대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지금도 남원양씨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본래 운봉의 산내면 지역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유평리(柳坪里), 대전리(大田里), 묘동(描洞), 매계리(梅溪里), 중기리(中基里)가 병합되어 대정리(大井里)에 편입되었다.
[자연환경]
마을 뒤에 삼봉산(三峰山)이 솟은 중산간지의 야산 지대이고, 마을 앞으로는 낙동강 상류인 람천이 흐르고 있으며, 경상남도 마천면으로 통하는 지방도가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현황]
중기리에는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63세대, 152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으며, 남자가 75명, 여자가 77명이다. 경지 면적은 31.9㏊로 밭이 11㏊, 논이 20.9㏊이다.
대부분 농촌 인구가 감소하는 것에 비해 중기마을의 가구수는 11가구가 증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매우 이례적인데, 실상사의 귀농학교, 한생명 등의 영향으로 귀농인의 정착이 많다.
농외 산업과 농업을 주업으로 하고 있으나 농경지가 입석리나 백일리 등 타 마을 구역에 있어 장거리 출장 경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불편을 겪게 되자 이의 대응책으로 실상뜰로 진입할 수 있는 세월교가 1985년도에 가설되어 경작에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마을 뒷산에는 실상사 부속의 서진암(瑞眞庵)이 세워져 있는데, 1100년경 창건한 것으로 추측되는 사찰로서 마을에서 약 300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미륵불상 1기가 보존되어 여승들이 관리하고 있다.
산간부인지라 개발이 늦어 1920년경 마을 앞으로 마천면까지의 지방도가 개통되었으며 1960년에 농업협동조합 창고가 2동 건립되었고, 1973년 마을 안길 500m를 확장하였다. 1975년 간이 급수 시설을 새마을 운동 사업의 일환으로 완공하였다.
1978년 기반 조성 사업으로 소하천 200m를 정비하였고, 새마을회관을 건립하였으며, 1979년 상중기 농로 200m를 개설, 우마차를 통행케 하였다. 1992년 주민 숙원 사업으로 포장을 완료하여 마을권 오지 문제를 해결하였다.
또한 1979년 공동 창고를 건립하여 복지 환경을 조성하였다. 1980년대에는 마을 안길 보수와 포장을 추진하였고, 1990년대 중반에는 바름골 등지 농로 개설 포장을 활발히 추진하여 주민의 농기계 운행에 편의를 도모하게 되었다.
1990년대 전후 주거 문화 개선을 위한 융자 지원 주택 개량 사업이 추진되었고, 1995년 마을 모정 20㎡를 신축하여 주민들에 대한 문화 공간의 시혜가 높아졌다.
1996년 마을 내 상수원 개발 사업이 착수되었으나 지형적인 여건으로 대형 관정 사업이 좌절되었으며, 주민들은 개인 모터를 개발하여 식수로 사용하고 있다. 마을 뒤의 전답은 축산업 사업장으로 탈바꿈하고 있으며, 각 가정에는 한봉을 부업으로 하고 있으며 단감이 생산되고 있다. 실상사 귀농학교의 귀농인들이 다수 생활하면서 젊은이들이 있어 활기가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