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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600223
한자 桂岩里
영어음역 Gyeam-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계암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석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행정리
면적 65.4㏊
총인구(남, 여) 103명(남자 51명, 여자 52명)[2014년 12월 31일 기준]
가구수 45세대[2014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에 속하는 행정리.

[명칭유래]

처음에는 마을 이름을 계암(鷄岩)이라 하였는데 계암마을은 무슨 연유인지 마을 사람들이 30세를 넘기 전에 요절하여 마을이 몰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인이 나타나 마을의 지세를 풍수로 풀어 주었다.

노인은 “뒷산 매봉이 매혈[鷹穴]이고 취암리 앞산이 수리[鷲]이니 이 두 형국 사이에 있는 닭바위[鷄岩]는 병아리[鷄]가 되어 잡아먹히는 형세이므로 마을이 재앙을 받는다”라고 하였다.

이어 노인은 마을 앞 청룡날이 계수바위[桂岩]이므로 닭 계(鷄)자 대신 계수나무 계(桂)자를 쓰면 무사할 것이라는 비책을 알려주고 사라졌다. 노인의 말대로 마을 이름을 계암(桂岩)으로 바꾸자 그 뒤로 주민들은 장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계암리(桂岩里)라는 명칭은 이러한 전설에서 유래하였다.

[형성 및 변천]

신라 56대 경순왕 후손 경주김씨 김정근(金正根)이 1781년(정조 5) 계암리에 처음으로 정착하여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넓은 들이 개척되어 농토가 넓어지니 1869년(고종 6)에는 동래정씨와 동복오씨가 옮겨와 살면서 마을이 커졌다. 그 후 양씨(梁氏), 임씨(林), 조씨(趙氏), 한씨(韓氏), 서씨(徐氏) 등 5개 성씨들이 차례로 이주하였다.

본래 운봉군 동면(東面) 지역으로 계암주 또는 계암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계암리·사창리(社倉里)·용계리(龍溪里) 일부가 병합되어 서무리(西茂里)로 편입되었다.

1972년 새마을 사업이 전개되어 주택 계량, 마을회관 신축, 450m의 직선 도로 등이 개설되었다. 1998년 5월 1일 동면이 인월면으로 개칭됨에 따라 남원시 인월면에 속하게 되었다.

[자연환경]

계암리는 배산임수형으로, 뒤쪽은 황산(荒山)의 끝자락으로 닭바위라 불리는 야산이 있어 겨울에 서북풍을 막아 주므로 온화하고, 앞쪽은 비교적 넓은 평지이며 동쪽으로는 풍천(楓川)이 흘러 농토가 비옥하다.

[현황]

광주 대구 고속 도로 지리산 I.C에서 인월면 소재지 방향으로 800m 지점에 위치한다. 광주 대구 고속 도로를 통하여 인월리지리산 국립공원 방향으로 들어설 때 첫 번째 만나는 마을로서 아영면과 함양군, 지리산을 이어주는 지방도 1084호선인 도로변에 형성되어 있다.

2007년 기준 면적은 65.4㏊이며, 2014년 12월 31일 현재 총 45세대에 103명(남자 51명, 여자 52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농경지가 넓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한다. 계암리 중앙에는 수백 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는데, 주민들은 봄철 이 느티나무의 잎이 피는 상태를 보고 그 해의 풍년·흉년·평년의 작황을 미리 점친다고 한다. 지금도 나이 많은 노인들은 이것을 철칙으로 신봉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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