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00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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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智異山 |
영어음역 | Jirisan |
영어의미역 | Jirisan Mountain |
이칭/별칭 | 두류산,방장산,남악 |
분야 | 지리/자연 지리 |
유형 | 지명/자연 지명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운봉읍|산내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치영 |
[정의]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운봉읍·산내면과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함양군·하동군·산청군에 걸쳐 있는 산.
[개설]
지리산은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함양군·산청군·하동군 등 3개 도, 5개 시·군에 걸쳐있는 거대한 산군(山群)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 남부 지방을 대표하는 산이다.
경위도상으로 이 산은 동경 127°27′~127°49′, 북위 35°13′~35°27′에 위치하며, 상세한 행정구역으로는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산내면·주천면,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광의면·마산면·토지면,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청암면·악양면, 산청군 금서면·삼장면·시천면, 함양군 마천면·휴천면 등 총 15개 읍·면에 걸쳐있다.
지리산은 1,500m 대의 높은 봉우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둘레가 약 320㎞이고 전체 면적이 483.022㎢에 달하는 거대한 산괴(山塊)를 이루고 있다. 지역별 면적분포는 대략 전라북도에 23%, 전라남도에 20%, 경상남도에 57% 정도이다. 최고봉인 천왕봉(天王峯)[1,915.4m]은 남한에서는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명칭유래]
지리산은 한자로 지이산(智異山)이라 쓰고 지리산이라고 읽는다. 고문헌에는 지리산을 그 음대로 지리산(地理山)이라 쓴 경우도 많다. 지리산의 명칭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智異’는 원래 지리라는 우리말의 음사(音寫)이며, 지리는 산을 뜻하는 ‘두래’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설이다. 두래는 ‘頭流’·‘豆流’·‘頭留’ 등의 한자를 붙여 산의 이름으로 많이 사용된다.
지리산의 이칭 중 하나인 두류산(頭流山)도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되나, 많은 문헌에서는 백두산의 맥세(脈勢)가 흘러내려 이루어진 산이어서 두류산이라 명명하였다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백두산의 맥이 잠시 정류(停留)하여서 두류산이라 이름 붙였기 때문에 두류의 ‘류’자는 ‘류(流)’가 아닌 ‘류(留)’로 쓰는 것이 옳다는 제안도 제시되어 있다. 둘째, 지리산의 이름은 “특이하게 슬기롭고 지혜로운 산”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다.
이것은 고대 불교에서 지리산을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의 도량으로 간주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이밖에도 지리산은 많은 별칭(別稱)을 지니고 있다. 먼저 지리산은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 일컬어져 왔다.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방장산·영주산(瀛州山) 등으로, 신선이 살고 불로초가 많다는 산이다. 지리산은 이 중 방장산에 대비되며, 봉래는 금강산, 영주는 한라산을 가리킨다.
지리산은 오악(五嶽) 중 하나인 ‘남악(南嶽)’으로도 불리었다. 오악은 산악에 대한 신앙으로 중국의 전국시대 이후 오행사상(五行思想)에 의하여 생겨난 개념이다. 오악은 동서남북과 중앙을 대표하는 산으로, 국가가 관장하여 봄과 가을에 제를 지냈다.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 백두산·금강산·묘향산·지리산·삼각산을 오악이라 하였으며, 이 중 지리산을 남악이라 칭하였다. 지리산은 조선 초기 ‘불복산(不伏山)’ 또는 ‘반역산(反逆山)’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큰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를 드릴 때 유독 지리산의 산신만 이를 거부하여 소지(燒紙)가 오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 뒤 지리산을 불복산 또는 반역산이라 부르고 역적을 지리산 기슭으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자연환경]
(1) 지형
지리산은 최고봉인 천왕봉을 동쪽 기점으로 하여, 주능선이 동~서 방향으로 제석봉(帝釋峯)[1,806m]·영신봉(靈神峯)[1,651m]·명선봉(明善峯)[1,582.57m]·삼도봉(三道峯)[1,499m] 등 1,500m대의 준봉들을 거쳐 노고단(老姑壇)[1,507m]까지 약 45㎞에 걸쳐 이어져 있다. 이 중 남원시에 속한 것은 명선봉·삼도봉 등이다.
그리고 주능선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으로는 15개 이상의 산각(山脚)들이 뻗어 있는데, 산각들 사이에는 20여 개 이상의 크고 작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어 일찍부터 농경지와 촌락의 터로 이용되어 왔다.
이 골짜기들은 매우 깊어 대부분 그 길이가 10㎞를 넘으며, 해발 700~800m의 고도까지는 경사가 완만하다가 그 이상의 고도부터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특히, 해발 300~700m부분에는 완경사면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농경지 개간과 마을 입지의 적지(適地)가 되었다. 남원시 쪽에는 뱀사골과 달궁계곡이 대표적이다.
삼림이 울창한 거대한 산지를 수원(水源)으로 하는 지리산의 계류는 물이 차고 맑으며, 수량이 풍부하다. 아름다운 경관을 제공할 뿐 아니라 집중호우가 올 때를 제외하고는 일 년 내내 유량의 변동이 크지 않아 훌륭한 식수 및 농업용수원이 되어 왔으며, 최근에는 수력발전에도 활용되고 있다.
지리산의 수계는 크게 둘로 구분된다. 하나는 섬진강 수계로, 지리산 서사면과 남사면에서 발원하는 하천들이 여기에 속하며, 다른 하나는 남강 수계로, 지리산 북사면과 동사면에서 흘러내리는 하천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남원시에 속하는 지리산의 경우, 먼저 서사면의 남원시 주천면 일대에서 발원한 계류들은 남원시를 관통하는 요천으로 흘러들어 전라남도 곡성군 동쪽에서 섬진강에 합류한다.
북사면의 운봉읍과 산내면에서 발원한 계류들은 만수천이 되어 지리산 서북단을 휘돌아 동쪽으로 들어가면서 심원계곡·뱀사골계곡·백무동계곡·칠선계곡 등지에서 흘러나온 물과 만나 임천강(臨川江)이 된다.
이 임천강은 협곡을 따라 급류를 이루며 흘러가다가 지리산 동북단에서, 지리산 북동사면인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일대에서 나온 물을 받아들이는 경호강(鏡湖江)에 합류하여 남강의 상류가 된다.
(2) 지질
지리산 지질의 골격은 지리산 변성암 복합체에 속한 변성암류와 이를 관입한 화성암류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역의 변성암류는 선캄브리아기에 퇴적되어 형성된 퇴적암류가 압력과 온도에 의한 변성작용인 화강암화작용을 받아 편마암으로 변성된 것으로, 지리산 전역이 편마암으로 덮여있다고 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화성암류로는 화강암이 주를 이루며 지리산보다 주변 지역에 주로 나타나는데, 운봉 일대가 대표적이다. 특히, 운봉분지는 침식에 상대적으로 약한 화강암에 의해 형성된 침식분지라 할 수 있다. 하천 및 계류 양안에는 제4기에 퇴적된 충적층이 나타나는데, 그 규모는 하천의 크기에 비례한다.
형성시기가 오래된 편마암 위주의 변성암으로 이루어진 지질은 지리산을 토산(土山)으로 만들었다. 여기저기 노출된 암석들로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화강암산지(花崗岩山地), 즉 석산(石山)과 달리, 토산은 장구한 시간동안 침식과 퇴적 작용으로 암석의 노출이 드물고 기복이 적어 전체적으로 산세가 부드러우며, 토심(土深)이 깊어 삼림이 무성한 산이다.
토산은 산세가 중후하면서도 푸근하여 인간에게 가장 친밀감을 주므로, 풍수지리설에서도 다섯 가지 산형(山形) 중 으뜸으로 친다.
(3) 기후
기후는 기온·강수·바람·습도 등의 기후요소에 의해 결정되며, 농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으로 산지의 기후는 기온이 낮고 일교차가 심하며, 강수량과 구름량이 많고, 바람도 강하며 고도에 따라 변화가 심한 것이 특징이다. 지리산 역시 이와 같은 산지의 기후특색을 지니고 있다.
지리산의 기온은 주변의 평지보다 낮으며, 지리산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지리산의 기온은 해발고도를 반영하여 주변 평지에 비해 연평균기온은 물론 월별 평균기온도 전월에 걸쳐 작게는 1~2℃, 크게는 5℃ 이상 낮다.
또한, 지리산 내에서는 남사면과 북사면 간에 기온 차이가 나타나는데, 북사면에 위치한 남원시 산내면 일대가 같은 고도의 남사면에 비해 기온이 낮다. 이러한 현상은 북사면과 남사면의 일사량 차이와 바람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남사면은 북사면에 비해 일사량이 절대적으로 많으며, 바람에서도 지리산이 겨울의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주고, 대신 남해에서 불어오는 온화한 남동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다우 지역으로, 특히 지리산 산정부에서 남해안에 이르는 지역은 최다 강수 지역인 동시에 호우가 가장 빈번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의 연강수량은 주변 평지의 그것에 비해 적게는 200㎜, 많게는 800㎜ 이상 내린다. 지리산 내에서는 기온 차와 유사하게 북사면과 남사면 간의 강수량 차이가 나타난다. 남사면의 강수량이 북사면에 비해 많은 것은 남해안 쪽에서 북진하는 장마 전선과 태풍의 영향이 크다.
또한, 고도가 높아 질수록 강수량도 증가하는데, 이것은 지형성 강우가 주요 원인이다.
(4) 동식물
지리산에 자생하는 식물은 약 1,400종으로, 한반도에 생육하는 식물의 약 30%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이 중 희귀 및 멸종 위기 식물은 60여 종인데, 섬말나리·새우난초·약난초·천마·사철란·구름송이풀·솜다리·삼백초·모데미풀·백부자·세뿔투구꽃·금강제비꽃 등이 있다.
또한, 지리산 특산식물로는 갓대·왕개서나무·지리개별꽃·지리바꽃·얼룩함박꽃나무·지리말발도리·히어리·지리터리풀·늦싸리·지리산싸리·지리강활·물들메나무·긴잎물들메나무·긴잎쇠물푸레·정향나무·지리오리방풀·둥근오리방풀·어리병풍·지리고들빼기가 있다.
지리산의 고도별 산림의 분포를 살펴보면, 해발 1,400m이하는 전형적인 낙엽 활엽수림으로, 습한 계곡부에는 느티나무·갈참나무·물오리나무가, 그리고 습도가 적당한 사면부에는 서어나무, 건조한 사면부에는 신갈나무·졸참나무·굴참나무 등이 자생하고 있다.
해발 1,400m 이상은 구상나무 등 침엽수림이, 정상부에는 철쭉·사스래나무 등 관목림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지리산의 산림은 난대식물에서 한대식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식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에서도 한국 특산식물과 지리산 특산식물이 많아 우리나라 산림자원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관광지 개발과 등산객의 증가 등으로 산림의 훼손이 우려되는 상황이어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게 요구된다. 지리산에 서식하는 야생동물은 포유류 16과 46종, 조류 111종, 어류 30종, 양서류 2목 5과 11종, 파충류 2목 5과 16종, 곤충 23목 271과 2,697종 등으로 알려져 있다.
[현황]
지리산의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 배경이 된 지리산의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지리산에서 석기 및 청동기시대의 유적이나 유물은 발견된 바가 없다.
다만 삼한시대인 B.C 84년 진한(辰韓)의 침략을 받은 마한(馬韓)의 한 부족국가의 왕이 지리산 달궁에 별궁(別宮)을 설치하고 황(黃)·정(鄭) 두 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지리산은 삼한시대에 마한·진한·변한,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으므로 이곳에서 이들 국가 간의 마찰이 빈번하게 일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지리산은 국경 방어를 위한 군사들의 일시적인 주둔지로서나, 세상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의 한시적인 은둔지로 이용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지리산은 고대국가가 형성되면서부터 산신 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나라에서는 지리산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 국가와 백성의 행복을 빌었다. 민족의 성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위치는 고려시대, 그리고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면면히 이어져왔다.
또한,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후, 지리산은 문수보살의 도량이라 하여 많은 사찰들이 들어섰고, 나중에는 그 숫자가 수백 개에 이르는 불교의 요람이 되었다. 지리산은 우리나라 무속신앙의 발원지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무속인의 기도처로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 전기까지 지리산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은 곳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순례와 유람을 위해 지리산을 찾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으나, 상주하는 사람들은 나무꾼과 사냥꾼, 그리고 승려와 무당 등 특수한 계층이었다.
지리산이 삶의 터전으로 중요시된 것은 임진왜란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지리산은 왜군과의 격전장이었던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에 위치하며, 남부 지방에서 산의 규모가 가장 크고 골짜기가 깊어 숨을 만한 곳이 널려 있어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리산으로 찾아드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17세기 이후 18~19세기에 걸쳐 경상도·전라도 등 인근의 평지에서 전쟁, 기근과 전염병, 가중되는 각종 부세와 역의 부담, 사회적 혼란 등을 피해 많은 농민들이 지리산으로 이주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지리산이 청학동이 존재하는 도가(道家)의 이상향인 동시에, 『정감록』 등 각종 비결류(秘訣類)에 피병(避兵)·피세지(避世地)로 언급되어 병화나 흉년을 당하지 않고 오래도록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9세기 후반에는 진주농민항쟁과 동학농민전쟁이 인근 지역에서 벌어져 이에 참여했다가 패배한 농민군과 함께, 전화(戰禍)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으로 입산하였다. 특히,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동학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인 김개남(金開南) 부대가 남원에 주둔하면서 구례군의 화엄사에 식량과 무기를 비축하였으며, 지리산 기슭인 운봉읍과 하동군 일대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지리산의 역할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도 계속되었다. 지리산은 토지로부터 축출되어 기근에 시달리는 농민,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은거한 독립운동가, 사회적 혼란을 두려워한 비결류 신봉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지리산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온 것은 해방이후였다. 1948년 여·순 반란 사건을 계기로 김지회(金智會) 등이 이끄는 반란군 1,000여 명이 지리산으로 입산하면서부터 한국동란을 거쳐 이른바 빨치산이 거의 토벌된 1955~1956년경까지 무려 7~8년 동안 지리산은 빨치산과 군인, 경찰간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우리나라 최고의 격전장이었다. 이 사이에 많은 주민들이 희생되고, 대부분의 마을이 소개(疏開)되고 일부는 불태워 지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리산 곳곳에는 많은 문화유적이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불교 문화재들이다. 많은 사찰이 전쟁과 사회적 혼란 속에서 사라졌지만, 곳곳에 화엄사·연곡사·쌍계사·대원사·법계사 등 유서 깊은 고찰들이 있다.
남원시에 속한 유명 사찰로는 828년(흥덕왕 3) 증각(證覺)이 창건하였다는 실상사가 있다. 이 절에는 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실상사 부도(보물 제36호)·실상사 삼층석탑(보물 제37호) 등의 문화재가 있고, 인근의 백장암 삼층석탑은 국보 제10호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실상사에는 풍수사상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전하고 있다.
지리산에는 불교유적 외에도 다양한 문화유적이 있다. 먼저 지리산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차(茶)를 재배한 곳이었다. 차는 828년(신라 흥덕왕 3)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大廉)이 종자를 가져와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그 시배지(始培地)가 바로 지리산이었다.
지리산이 시배지로 선정된 까닭은 이곳이 차 재배에 가장 좋은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리산에서 차가 처음 재배된 곳에 대해서는 화엄사 주변 즉 현재의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일대라는 설과 쌍계사 주변 즉 현재의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일대라는 설이 있으며, 운수리에는 기념비가 있다.
또한, 지리산 남쪽의 구례군 토지면에는 사적 제106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주관칠의사묘가 있다. 이것은 1597년(선조 31) 정유재란 때 영남과 호남을 잇는 요충인 석주관을 지키기 위하여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의병 7인의 무덤이다.
오늘날 지리산에는 300여 개에 가까운 많은 마을이 존재하는데, 그 대부분은 농업을 기반으로 한 마을이다. 지리산에서 농업이 주민들의 주된 생업으로 자리 잡은 것은 인구가 급속하게 성장한 18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화전(火田)을 일구어 생활하다가 인구가 늘어나면서 영구히 농사를 짓는 밭으로, 다시 계단식 논을 만들어 논농사로 전환하였다. 그래서 산업화와 도시화의 물결이 밀어닥치기 전인 1960년대까지 지리산의 주민들은 벼농사를 위주의 농업으로 생활을 영위하였다.
그러나 지리산 주민들은 평지에 비해 열악한 농업환경 때문에 농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일찍부터 생계를 보충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았고, 그 결과 풍부한 산림자원을 활용해 다양한 생업을 영위해 왔다.
지리산의 주민들이 산림에 의존하여 전통적으로 수행해온 생업은 제탄·제지·목기제조·양봉·버섯·산나물·나무수액을 비롯한 산림 부산물의 채취 등 매우 다양하였는데, 이 중 제탄, 제지는 자취를 감추었고 목기제조는 남원시 산내면을 중심으로 계속되고 있다. 한편, 양봉과 고로쇠나무·거제수나무의 수액채취는 최근 들어 더욱 활발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쇠퇴 일로에 접어든 농업의 대안으로 지리산 주민들이 새롭게 그리고 가장 널리 채택한 생업은 수려한 자연 경관과 풍부한 문화유적을 활용한 관광업이었다.
관광업의 확대는 1980년대 이후 지리산 내부의 도로들이 차례로 확·포장되면서 많은 마을이 자동차로 쉽게 접근이 가능해져 관광업을 새로운 생업으로 채택한 주민들은 대개 민박과 식당을 운영하고, 관광객들에게 한봉·흑염소·고로쇠나무 수액 등을 판매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지리산은 전체적으로 아기자기한 멋은 부족하지만 중후하고 인자한 모습을 지닌 산이다. 이러한 지리산 나름의 산악미 때문에 1967년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다. 지리산은 천왕봉·반야봉·노고단 등의 3대 주봉과 함께 해발 1,500m 이상의 큰 봉만도 10여 개에 이르며, 피아골과 뱀사골·화엄사계곡 등 10㎞ 이상의 계곡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다.
또한, 불일폭포·구룡폭포·칠선폭포 등과 같은 폭포와 철쭉나무 군락, 고사목 등이 어우러져 있어 예로부터 탐방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리산10경으로 노고운해(老姑雲海), 피아골단풍, 반야낙조(般若落照), 섬진청류(蟾津淸流), 벽소명월(碧沼明月), 불일폭포, 세석철쭉, 연하선경(烟霞仙景), 천왕일출(天王日出), 칠선계곡을 꼽는데, 이중 반야낙조가 남원시에서 볼 수 있는 경관이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지리산의 등산로는 비교적 잘 정비되어 있다. 지리산은 워낙 규모가 크기 때문에 다양한 등산로가 개발되어 있는데, 등산객이 많이 찾는 등산로는 화엄사에서 노고단·임걸령·반야봉·뱀사골산장·연하천·벽소령·덕평봉·세석평전·장터목·천왕봉·법계사 중산리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 코스이다.
백무동에서 한신계곡·하동바위·장터목·천왕봉에 이르는 길 등이 있으며, 남원시 쪽에서는 전적기념관·탁용소·간장소·화개재로 이어지는 뱀사골 코스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