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6025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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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음역 | Kim Juyeol Yeolsawa 4.19 |
영어의미역 | Kim Juyeol and April Revolution |
분야 | 정치·경제·사회/정치·행정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병옥 |
[개설]
1960년대에 남원 출신 김주열이 없었다면 마산의 3·15는 항쟁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우리 역사에서 4·19혁명도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마산의 국립3·15민주묘역도, 서울의 국립4·19민주묘역도 없었을 것이다. 3·15의거에서 4·19혁명까지 김주열이 어떤 일들을 수행하였기에 이런 결과가 빚어질 수 있었는가?
[태생적인 호남·영남인]
김주열(金朱烈)은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아버지 김재계(金在戒)와 어머니 권찬주(權燦珠) 슬하에서 1944년 10월 7일 태어났다. 위로 누님이 두 명 있으나 큰어머니 슬하이고 영남인(경상남도 함양군)인 어머니 사이에서는 형(김광열)과 동생(김기열)이 태어났다. 이는 우연일 수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필연으로 귀결되고 있다.
금지동초등학교와 금지중학교를 각기 6회로 졸업할 때까지 김주열은 성적이 상위급에 속한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태어날 당시 남원 지역 최고의 곡창 지대 금지에서도 천석군을 자랑하던 부농이 급격하게 몰락해 진학의 어려움을 고민할 정도가 되었다.
1959년 진주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루어 합격하였는데 외할머니가 진주에 살고 있었으나 거리가 멀다는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로 진학을 포기하고 남원농업고등학교(현 용성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던지 2개월을 채 다니지 못하고 재수를 시작했고 겨울에 들어서는 서울로 올라가 YMCA에서 영어 공부를 하면서 입시에 대비하였다.
1960년에 철도고등학교 입시를 치르렀으나 실패하게 되는데 당시 철도고등학교를 선택한 자체만으로도 가계가 극도로 나빠진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어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는데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형 김광열의 친구이면서 선배인 하용웅이 당시 마산상고에 다니고 있었는데 기울어진 가계를 일으켜 세우는 데는 상업고등학교를 나와 은행원으로 취직하는 것이 지름길이라는 충고를 받아드리게 된 것이다.
더구나 마산에는 이모할머니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의탁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서 접수 기간이 문제였다. 일단 방향을 바꾼 김주열은 하용웅 선배의 담임선생님을 통해 원서 마감 일자를 넘겨 간신히 원서를 접수하게 되었다. 호남인이 영남 지방에 진학하는 경우는 당시로서는 희귀하였으나, 김주열은 끝내 영남으로 가게 된 것이다.
[당시의 시대 상황]
해방 정국에서 미국의 꼭두각시가 되어 정권을 잡은 자유당 이승만 정권은 사사오입 국회를 통해 3대 대통령이 되었고 다시 4대 대선에 입후보한다. 그러나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미국에서 치료 중 사망하여 사실상 부통령 선거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비리와 부정과 폭압으로 지탱해 온 정권으로 인해 민심이 민주당으로 쏠리자 불안해진 이승만 정권은 할 수 있는 모든 부정과 탄압을 동원하면서 국민적 저항을 받게 되었다.
일요일인 2월 28일 민주당의 유세가 대구에서 계획되었는데 관권을 통해 학생들을 등교시키자 이에 항의해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시위에 돌입하게 되고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2·28 대구 항쟁이 그것이다.
선거 당일은 3인조, 5인조의 투표조를 짜서 기표를 확인하는 투표를 하는가하면 민주당 표가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에게는 투표통지표를 배부하지 않았고 30~40%가 기권할 것으로 보고 미리 기표하여 투표함에 넣어놓고 투표를 감행하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
금전 매수는 물론 정치 깡패를 동원한 공포 분위기 조성과 압박, 투표장에서의 야당 참관인 축출, 야당 참관인을 매수하여 참관을 포기하게 하는 등 모든 불법과 부정을 동원하였다. 투표 후에도 투표함 바꿔치기, 야당표를 여당표로 바꿔치기하는 수법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부정선거 작전 이면에는 각 시·도 경찰국과 시장 군수에게 지시하여 여당 득표율이 85%를 넘지 못할 경우 파직한다는 조건으로 사표까지 미리 받아두고 있었던 것이다.
[마산의 3월 15일]
당시 마산 국회의원은 민주당 공천으로 당선된 허윤수이었다. 그러나 허윤수는 자유당 경남도당 위원장 이용범으로부터 차기 자유당 국회의원 공천과 당선 보장, 동양주정 경영권 인수 등으로 매수되어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하여 경찰과 공무원 조직을 손에 쥐고 3·15부정선거를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당연히 마산 시민들은 허윤수의 배신과 자유당의 공작 정치에 치를 떨고 있었다.
선거 당일 아침 민주당 소속 도의원 부인 안맹순이 투표소에 들어가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중 투표함을 넘어뜨렸는데 그 안에서 미리 투표해 넣은 투표지가 쏟아져 나와 사전 투표 현장이 들통나게 되었다.
민주당 마산시당에서는 10시 30분을 기해 선거 무효 선언을 했으며, 이어 민주당 경남도당과 민주당 중앙당에서도 선거 불법 무효를 결의하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민주당 소속 선거 참관인의 철수를 각 지방당부에 통첩하게 되었다.
마산에서는 민주당을 주축으로 불법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들어갔으나 경찰이 해산을 종용해 무산되었다. 그러나 오후 4시경 플랜카드를 앞세우고 다시 시위에 들어가자 경찰이 시위대를 급습하여 무자비한 폭력으로 6명을 연행하자 군중이 이 6명의 만세에 동조하며 호응하였다. 군중은 5천 여 명으로 불어났다.
오후 5시에 투표는 끝났으나 시위대는 개표 시간인 7시에 개표 장소인 마산시청으로 모이기로 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7시가 가까워 오자 군중은 시청 앞으로 모여들었고 경찰은 소총으로 무장하고 대기한 상태였으며 소방차의 물펌프와 자동차의 헤트라이트 최류탄도 준비되어 있었다.
[3월 15일의 김주열]
당시의 학기는 4월 1일에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마산상고는 합격자 발표를 3월 14일로 정했으나 군중이 모이는 것을 꺼린 교육청의 종용으로 16일로 발표일을 연기했다. 계획대로 합격자를 발표했다면 김주열은 15일 새벽에 마산을 출발해 고향 남원으로 오고 있었을 것이었다.
형 김광열과 동행했던 김주열은 마산의 중앙부두 목재 야적장 등에서 가정과 장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오후 늦게 하용웅의 담임선생님을 찾아 합격을 확인했으나 마산을 출발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첫차를 타지 않으면 당일에 남원에 도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주열 형제가 저녁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밖에 나갔다 돌아온 이모할머니가 밖에 난리가 났으니 너희들도 빨리 나가보라고 독려했다. 이모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민주당 당원이어서 투표통지서가 나오지 않아 종일 속을 썩고 있었다.
형제는 시위대에 합류하여 마산시청 근처까지 육박해 들어갔으나 혼란 속에 헤어지게 되었다. 마산시청에는 지청장 서득룡, 경찰서장 손석패, 국회의원 이용범, 허윤수, 사단장 김희덕, 시장 박영도가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박종표 경비주임이 현장을 지휘하고 있었고 경찰은 이미 실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투석으로, 경찰들은 물대포와 강렬한 라이트로 대치하고 있던 중 소방차가 전신주를 받아 고압선이 끊어지면서 순식간에 암흑으로 변해 버렸다.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경찰은 7시 50분경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박종표 경위는 시위대를 향해 최류탄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이날 경찰의 총격으로 6명이 현장에서 죽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였으며 수백 명이 연행되었는데 연행자를 수용할 방법이 없어 열차 화물칸을 빌려 가두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형 김광열은 시위대를 따라 쫓기고 쫓기다가 16일 02시 30분이 넘어서야 이모할머니집에 돌아왔는데 김주열은 돌아와 있지 않았다.
성난 시위 군중은 이날 밤 남성동 파출소, 자유당 마산시당 사무소, 서울신문 마산지사, 마산시장 박영도의 집, 국회의원 허윤수의 집을 파괴하였으며 파출소를 점령한 시민들의 발에 넘어진 난로의 화재로 북마산파출소가 불탔다. 형 김광열은 16일 김주열을 찾아 마산의 모든 병원과 시위대 수용기관을 찾아 헤맸으나 흔적을 찾지 못한 채 장학생으로 합격한 합격증을 찾아 17일 남원으로 향했다.
[좌익 용공 분자와 어머니 권찬주]
“주열이를 찾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떠난 어머니 권찬주는 마산 시내를 샅샅이 뒤지고 다니면서 김주열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산은 이미 좌익 폭동과 용공 분자들의 난동으로 내몰려 누구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동토의 세상이 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권찬주만 마산을 휩쓸며 “내 아들 주열이를 찾아내라”고 외쳤고 마산시청 뒤의 연못에 시신을 수장했다는 제보를 받고 7m 깊이의 물을 퍼내게 하고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바닥을 뒤졌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김주열은 끝내 행방불명자로 처리될 수밖에 없게 되었고 탈진한 어머니는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한 채 마산을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4월 11일의 김주열 부활]
11시경, 마산의 중앙부두 앞에 검은 학생복을 입은 시신이 물에 떠올라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부가 발견했다.
어부는 기자들이 모인 다방으로 달려갔고 기자들이 도착했을 때는 벌써 경찰들이 출입을 통제하며 사진 촬영을 막고 있었다. 연합통신 허종 기자가 바바리 코트 안에 사진기를 숨겨 넣고 들어가 몰래 촬영을 하였다.
11시 30분경 인양된 시신은 김주열로 확인되었는데 오른쪽에 폭탄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이것은 ‘직접 군중을 향해 쏘지 말라’는 경구까지 적혀있는 직경 40㎜, 길이 180㎜의 미국제 C·N 최류탄이었다. 3월 15일 평화로운 시위를 사격으로 진압한 경찰이 참혹한 시신을 군중들이 보면 큰 불상사가 날 것을 염려해 남해 바다에 버린 시신이 27일 만에 김주열이 형과 함께 집안을 걱정하며 얘기하던 부두 앞에서 떠오른 것이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마산 시내에 퍼졌고 시민들은 시신이 안치된 마산도립병원으로 몰려들었다. 좌익 폭도로 내몰리고 용공 분자가 되어 숨조차 쉴 수 없었던 마산시민들은 이 참혹한 주검과 자유당 이승만 정권의 잔혹한 만행에 치를 떨며 다시 거리로 나섰다.
오후 6시 15분경에는 3천 명이 넘는 시위대가 ‘왜 우리를 빨갱이로 모느냐?’며 서울신문 마산지국을 박살냈고 다음 날인 12일에는 1만여 명이 넘는 학생과 시위대가 마산도립병원 앞에서 ‘김주열군의 시체가 잔인무도하게 살해되었음을 용인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시위에 돌입하였다.
마산의 2차 의거가 시작된 것이다. 이는 오직 김주열의 주검이 시신으로 부활되어 일어난 의거였다. 이 2차 마산 의거는 부산으로 광주로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라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거리로 나서게 했고 드디어 4·19혁명으로 폭발하게 되었다.
[무덤이 셋인 김주열 열사]
마산의 2차 의거가 없었다면 3·15는 명예회복은 되었을망정 의거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국립 마산 3·15민주 묘역’도 없었을 것이다. 마산의 2차 의거가 없었다면 당연히 4·19혁명은 우리의 역사에 있을 수 없을 것이며, 따라서 ‘국립 4·19민주 묘역’ 또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과 마산에 두 곳의 국립 민주 묘역을 만든 것은 김주열의 4·11부활에 의해서이며 마산·서울의 민주 묘역의 핵은 당연히 김주열 열사이기 때문에 이 민주 묘역들에 김주열의 묘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고향 남원의 선산에 안장되어 있다. 그래서 김주열의 묘는 두 곳의 국립 민주 묘역에 가묘가 있어 진묘와 함께 세 곳에 만들어져 있다.
또 하나 간과해서 안 될 것은 태생적으로 호남 출신의 아버지와 영남 출신의 어머니 슬하에서 태어나 살아서는 호남의 아들이었고 죽어서는 영남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영·호, 동·서를 연결하고 화합을 이루었던 사람이 바로 김주열이라는 사실이다.
이에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에서는 2007년 4월 9일부터 11일까지 ‘화해와 소통을 위한 186 김주열 대장정’ 행사로 남원의 열사 묘소에서 마산의 국립민주묘역까지 이어달리기 행사를 하였다. 앞으로도 이 행사는 확대·시행될 것이다. 김주열(金朱烈), 그는 숙명적으로 열사였다. 그 이름이 ‘붉은(朱) 열사(烈)’인 것이 우연일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