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9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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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瑩源寺 -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동 112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상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3년 - 영원사 터 현장 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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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4년 11월 - 영원사 터 승탑, 탑비, 석불 등 정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72년 2월 12일 -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 승탑과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 묘응탑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 |
소재지 | 영원사 터 -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동 112 |
출토 유물 소장처 | 영원사 터 -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동 112 |
성격 | 사찰 터 |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동에 있는 사찰 터.
[개설]
영원사(瑩源寺)는 사찰의 이름은 전해지고 있으나, 창건 연대와 폐사 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금석문 및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몇몇 문헌에만 존재가 알려져 있다. 현재 영원사 터에는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 승탑(密陽 瑩源寺址 寶鑑國師 僧塔)과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 묘응탑비(密陽 瑩源寺址 寶鑑國師 妙應塔碑)가 있다.
[변천]
영원사는 통일신라 때 창건되었다가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중요한 사찰로 발전하였다. 당시에는 정오(丁午), 보우(普愚)를 비롯하여 국통이나 왕사를 지낸 명망 높은 승려들이 주석하였으며, 여러 번 소속 종파가 바뀌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 나옹(懶翁)이 왕명으로 영원사로 오던 중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한 사실 등은 영원사가 고려 왕실의 끊임없는 관심 속에 있었던 사찰이었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영원사는 쇠락을 거듭하다가 폐사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있던 영원사에 관한 기록이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 없는 점으로 볼 때, 영원사는 1430년(세종 12)에서 1469년(예종 1)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영원사 터는 경상남도 밀양시 활성동 112 일대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영원사에 대한 최초 조사는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영원사 터는 활성리 뒤 계곡에 있으며, 탑의 기단석인 기석(基石) 3개가 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1963년에는 청자 8점과 청동합 1점이 신고되어 발견 장소를 확인하기 위한 현장 조사가 이루어졌다. 조사 결과 영원사 터에는 비록 파괴되었으나 여러 승탑이 존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현황]
영원사 터로 추정되는 곳에 흩어져 있던 승탑, 탑비, 석불 등을 1974년 11월에 모아 정비하였다. 이 가운데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 승탑과 밀양 영원사지 보감국사 묘응탑비는 1972년 2월 12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영원사는 폐사되었지만, 영원사 터에 남아 있는 승탑과 탑비는 고려시대 불교사뿐만 아니라 불교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