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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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膺九 |
영어공식명칭 | Jang Eung-g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선미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효자.
[가계]
장응구(張膺九)의 본관은 인동(仁同)이며, 아버지는 진사 장창익(張昌翼)이다. 조선 후기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장응구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7세에 서당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중 아버지가 병석에 눕게 되자, 밤잠을 멀리하고 간호를 한 탓으로 지쳐 병이 들 정도였다. 동지섣달에도 집 앞의 강에 나가 얼음을 깨고 물고기를 잡아 반찬으로 올릴 정도로 부모의 식사에 정성을 기울였다. 아버지가 완쾌하여 과거에 응시하려 길을 떠나자, 과거 급제를 기원하여 매일같이 치성을 드리고, 아버지가 돌아오는 날까지 밤마다 문 앞에 등불을 켜 놓고 기다렸다. 아버지는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아버지가 90세로 사망하자 장응구는 단장면 고례리 풍유동의 은점곡 산 정상에 무덤을 마련하였는데, 자택에서 구곡천을 건너 4㎞[10리]쯤 떨어진 곳이었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겨울이면 묘소 옆에 풍막이를 만들어 눈바람을 막았다. 시묘살이를 마친 후에도 매일 성묘하였는데, 산소에 갈 때마다 돌을 들고 가서 묘소 옆에 있는 구덩이를 메웠다.
장응구는 산소로 가는 길의 강에 큰 다리를 만들고, 다리가 폭우로 사라지자 다시 만들기를 수차례 반복할 정도로 성묘에 정성을 쏟았다. 매일 성묘를 한 까닭에 손발이 닿았던 곳에는 풀이 자라지 못하였다 할 만큼 생전보다 사후에 효성이 더욱 지극하였다.
[상훈과 추모]
장응구의 효성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주위 사람들의 주선으로 삼성각의 제당을 건립하였다. 현판에는 ‘효자 장응구 효행’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