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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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相寬 |
영어공식명칭 | Lee Sang-guan |
이칭/별칭 | 이정헌(李禎憲),이상관(李相寬),이상관(李相官),이상관(李尙官),이상관(李相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배태수 |
출생 시기/일시 | 1891년 4월 1일 - 이상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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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8년 - 이상관 중국으로 이주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7월 - 이상관 중국 남만주 환인현 일대에서 정의부 지방행정부 환인남구총관으로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이상관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 및 조선혁명군 재무부장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1월 - 이상관 조선혁명군 제2회 군민대표회의 참석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12월 15일 - 이상관 일본군 동변도 특별공작부에 체포 |
몰년 시기/일시 | 1936년 12월 16일 - 이상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 이상관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퇴로리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
거주|이주지 | 중국 - 중국 |
학교|수학지 | 신흥무관학교 - 봉천성 동변도 유하현 제3구 고산자가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신흥무관학교 재무상|남만주 환인현 정의부 지방행정부 환인남구총관|국민부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조선혁명군 재무부장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상관(李相寬)[1891~1936]은 1891년 4월 1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평(咸平)이며, 원래 이름은 이정헌(李禎憲)이다. 상관이란 이름은 1930년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도 이상관(李相官), 이상관(李尙官), 이상관(李相觀) 등을 같이 사용하였다.
[활동 사항]
이상관은 1918년 중국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다. 이후 신흥무관학교 재무상(財務相)을 지냈고, 1925년 7월 중국 남만주(南滿洲) 환인현(桓仁縣) 일대에서 정의부(正義府) 지방행정부(地方行政部) 환인남구총관(桓仁南區總管)으로 활동하면서 군자금과 군량미 모집에 전념하였다. 1929년 5월 28일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고 그 산하에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 운영될 때 국민부의 재정 및 물자 조달을 주관하였다.
이상관은 1935년부터 국민부 산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중앙집행위원(中央執行委員) 및 조선혁명군 재무부장(財務部長)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1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회 군민대표회의(軍民代表會議)에 참석하였다. 일제와 위만주국(僞滿洲國)은 조선혁명군의 계속된 활동이 이상관의 역할에 힘입은 바 크다고 판단하여 큰 현상금을 걸고 특무원까지 파견하여 체포에 혈안이 되었고, 이상관의 자진 투항을 위하여 가족들을 헌병대에 구금하고 온갖 고문을 가하였다.
이상관은 1936년 12월 15일 일본군 동변도 특별공작부(東邊道特別工作部)에 체포되어 환인현 헌병대(桓仁縣憲兵隊)로 압송되어서 온갖 고문을 받다가, 1936년 12월 16일 이송된 봉천(奉天) 북대영(北大營)에서 일제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묘소]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 이상관을 기리는 독립의사 함평 이공 휘상관 기적비(獨立義士咸平李公諱相寬紀蹟碑)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상관에게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