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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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密陽靑年聯盟 |
영어공식명칭 | Miryang Youth Federatio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유식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지역에서 청년운동을 전개한 사회단체들의 연합체.
[개설]
밀양청년연맹은 일제강점기 밀양 청년운동의 연합 기관으로, 밀양 읍내 청년운동을 넘어 군 전체를 아우르는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설립 목적]
밀양청년연맹은 밀양 지역 청년 단체들의 고립성을 극복하고 청년 단체들 상호 간의 통일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강령은 ‘우리는 역사 발전에 필요한 신사회를 목표로 하고 전진함’, ‘우리는 호상 친목을 도모하여 정의의 희생정신을 함양하기로 기함’ 등이었다.
[변천]
1925년 11월 23일에 밀양청년회, 밀양여자청년회, 밀양역전구락부, 삼랑진에쓰청년회, 역전부인회 등 6개의 참가 단체로 출발하였으나 충분한 시간적 여유와 민주적 토의 과정을 거쳐서 결성된 것은 아니었다. 하남면 수산청년회와 무안면 무안청년회 등의 지역 청년 단체들과 함께하지 못하여 조직의 결속력은 강하지 않은 상태로 출발하였다. 그 결과 밀양청년연맹에 참가하였던 삼랑진에쓰청년회와 역전부인회 등이 이내 탈퇴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25년 11월의 경북의열단사건에 밀양청년연맹 결성을 이끌어 왔던 김병환과 한일근이 연루되어 검거됨으로써 밀양청년연맹은 1926년 이후 별다른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5년 11월 29일에 창립된 경남도청년연맹에 차철(車徹)과 정광호(鄭光浩)가 집행위원, 윤철한(尹鐵漢)이 검사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25년 12월 김해, 창원, 밀양 3군 경계의 청년회를 대상으로 한 진영삼각청년연맹에 참가하는 군내 단체에 대하여 밀양 청년운동의 통일을 방해하는 분열적 이류(異流) 단체로 간주하여 강력히 대처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6년 여름 수해 발생 시 수재민을 돕기 위한 수제구제금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밀양청년연맹 발기위원 김래봉이 수제구제금을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밀양청년연맹과 청년단체의 이미지는 크게 손상되었다.
1926년 10월 곡마단 공연 중 맹수가 관람하던 어린이를 죽인 사건에 대하여 곡마단을 상대로 유족의 위자료 배상 청구를 강력히 요청하는 등 일상적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3월 국농소 소작쟁의 때 조직된 농소소작동맹 집행위원회에 들어가 있던 밀양청년연맹 집행위원 정광호를 매개로 하여 초기 국농소 분쟁 해결에도 관여하였다.
[현황]
밀양청년연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한 인물은 김병환(金鉼煥), 정광호, 박의정(朴義貞), 장세영(張世英), 한일근, 차철, 강덕수(姜德壽), 진기준(陣起準) 등이었다. 밀양청년연맹은 사상단체 오륙회 핵심 청년을 중심으로 3·1운동에 참여한 김병환·강덕수, 의열단 사건 관련 활동가 김병환·한일근, 밀양여자청년회 박의정, 그리고 삼랑진에서 활동한 장세영 같은 읍외 지역 청년단체 활동가들로 구성되었다. 1928년 7월 밀양청년동맹이 결성됨으로써 밀양청년연맹은 역할을 다하였다.
[의의와 평가]
밀양청년연맹 결성으로 종래 지배 엘리트 중심의 문화운동에서 사회주의 성향의 저항 엘리트 청년운동으로의 변화가 가속화되었고, 또한 읍내 중심의 청년운동에서 벗어나 군 단위 전체를 아우른 대중운동으로 발전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