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4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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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有富 |
영어공식명칭 | Kim Yubu |
이칭/별칭 | 성로(性老),어초와(魚樵窩),충효(忠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김경수 |
출생 시기/일시 | 1549년 - 김유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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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92년 - 김유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싸워 공을 세움 |
몰년 시기/일시 | 1621년 - 김유부 사망 |
출생지 | 벌원리 -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
거주|이주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묘소|단소 | 김유부 묘소 -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봉의리 |
사당|배향지 | 탁삼재 -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봉의3길 40[봉의리 554] |
성격 | 의병장 |
성별 | 남성 |
본관 | 김녕(金寧) |
대표 관직 | 사복시정 |
[정의]
조선 후기 밀양 출신의 의병장.
[가계]
김유부(金有富)[1549~1621]의 본관은 김녕(金寧)이며, 자는 성로(性老), 호는 어초와(漁樵窩)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낸 김동명(金東明)이고, 할아버지는 훈련원첨정 김시성(金時盛)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정 김윤원(金允元)이다. 부인은 허희원(許希遠)의 딸 분성허씨(盆城許氏)이고, 아들은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참전하여 전사한 김기남(金起男)·김난생(金蘭生)이다.
[활동 사항]
김유부는 1549년(명종 4) 밀양부 오치현(烏峙峴) 동쪽 벌원리(伐院里)[현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뛰어났으며, 네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한 뒤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고 한다.
김유부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참전하여 연로한 어머니를 등에 업고 다니며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호평 전투와 황산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유천·경주·울산 등지에서 왜군을 무찔렀다. 특히 대구 팔공산 전투와 밀양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이에 권율(權慄)과 한준겸(韓浚謙)이 임금에게 보고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고 통정대부 용양위장군에 제수되었으며, 사복시정에 임명되었다.
김유부는 전쟁이 끝나고 선조가 환도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밀양에서 은거하다가 1621년(광해군 13) 사망하였다.
[묘소]
김유부의 묘소는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봉의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유부는 사망 후 통정대부 승정원좌승지 겸 경연참찬관(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고 충효(忠孝)라는 시호와 정려가 내렸다. 후손들이 현 밀양시 산내면 봉의리 554에 탁삼재(卓三齋)를 세워 김유부와 두 아들 김기남·김난생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