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T05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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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文山邑 召村마을-召村驛과 文山聖堂의 歷史 |
이칭/별칭 | 역마을/성당마을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문산읍 소문리 |
시대 | 현대/현대 |
[역사]
문산읍의 소문리는 조선시대에 소촌역(召村驛)이 있었던 곳이다. 『여지도서』의 경상도 진주목 역원조(驛院條)에 의하면, 역의 책임자로 본래 역승(驛丞)이 있었으나 나중에 찰방(察訪)을 두었다고 한다. 찰방은 조선시대 각 도의 관찰사에 소속되어 도로의 역참(驛站)을 관할하던 종6품의 관직자로, 일정한 구간의 간선도로를 단위로 찰방 또는 역승을 두어 이를 관장토록 하다가 1535년(중종 30)에 역승을 없애고 찰방으로 승격시켰다.
『여지도서』에는 소촌역에 소속된 마필로 대마(大馬) 2필,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10필이 있었으며, 역리(驛吏) 1,714명, 노(奴) 869명, 비(婢) 390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다스리던 문산찰방은 진주·남해·고성·거제·진해 등 인근 15개 역도 함께 관할하였다.
당시 소촌역을 관할하던 찰방관서는 현재 문산성당(문산읍 소문리 58번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찰방 관서를 중심으로 그 앞에 역리들의 관사가 있었고, 주변에는 역리와 그 가족들이 살았던 집들로 둘러있었다고 한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역리의 수가 1,714명이라 하였으니, 소촌역의 주민 구성은 소촌역과 관련된 사람들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문산읍이 1읍 1촌으로 형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의 소촌도 1면 1촌으로 구성된 대단위의 역촌마을이었다.
찰방 관사는 1885년(고종 22) 찰방제도가 폐지된 이후 현재의 문산성당에 매각되었다. 당시 프랑스인 신부 권 마리오 줄리엥이 1907년에 찰방관서와 주변의 역리관서 10여 동의 찰방 관할 부지 2,400여 평을 구입하여 문산성당의 본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다가 1937년 현재의 성당 건물이 완공되면서 완전히 철거하였다. 다행히 당시의 사진이 남아 있어서 그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도 동네사람들은 가끔 성당자리에서 말 뛰어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이곳은 진주 소속의 각 읍·면 중에서 유일하게 원우(院宇)·재사(齋舍)·제각(祭閣) 등의 유적이 전혀 없는 곳이다. 아마도 역리들이 중심을 이룬 마을이라는 특징 때문에 주로 양반문화와 관련된 원우·재사 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2)문산성당
문산읍 소문리 58번지에 소재한 문산성당은 소문리 자체가 ‘성당마을’이라 불릴 정도로 소문리의 현대사와 성당의 역사는 불가분의 관계라 할 수 있다.
『문산성당 80년사』에 의하면, 문산에 처음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1863년(철종 14)에 전라도 다구산에 숨어 살던 천주교 신자 최누수가 지리산을 넘어 문산에 머문 것이 시초라고 한다. 그 이후 프랑스 파리 외방선교회 산하의 사제들이 선교에 노력하여 한불수호조약이 맺어진 1866년 이후에 문산공소가 설립되었다. 한불수호조약의 체결 이후 파리 외방선교회는 경상도 교구를 설정하기 위해 로베르[金保祿] 김 신부를 대구로 파견했으나, 로베르 신부는 대구에 들어가지 못하고 왜관의 신자 집에서 3년간 은거하며 전교 활동을 했었다. 이때 로베르 신부가 전교활동을 하던 중 문산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문산의 교우들이 어느 교우 집에 모여 로베르 신부를 모시고 미사를 올렸다. 이후 문산이 대구교구의 주목을 받아 문산공소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데, 문산성당에서는 공소의 출발을 1888년(고종 25) 경으로 보고 있다.
1905년 경상도에서는 부산과 마산에 이어 셋째로 본당으로 승격, 초대 신부로 줄리엥 권(權裕良, Malius Julien) 신부가 부임하면서 지금의 문산성당이 되었다. 2년 뒤에 소문리에 있던 찰방관사와 주변 건물 10여 채를 매입하여 성당 건물로 삼았고, 이후 1932년에 수녀원을 건립하고 1936년에는 현재의 성당 건물이 완공되었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점령 하에 안전보위부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전쟁의 와중에 파괴된 것을 전쟁 이후 다시 복구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2002년에 성당 안의 강당 건물과 함께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국가지정등록 문화재(제2002-24호)로 등록된 문산성당은 교회당 330.58㎡, 강당 165.29㎡의 진주 최초의 성당이다. 해방 전까지만 해도 서부 경상남도의 중심 성당으로, 한식과 양식의 신구 본당이 경내에 공존함으로써 성당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양식 건축양식을 지역의 건축 여건에 맞게 해석해 설계, 시공한 건축물이다. 또한 강당 건물은 1923년에 경상남도 고성의 어느 사찰에서 건물 한 동을 그대로 옮겨서 지었다고 전해지는데, 건물의 기와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번와색 강명해 (燔瓦色 姜命海)
와장 함춘상 (瓦匠 咸春上)
정곤상 (鄭昆上)
주(송)립(?)이 (朱(宋)立(?)伊)
강희 이십사년 을축 (康熙 二十四年 乙丑)
즉 ‘번와색 강명해와 기와를 굽는 와장 함춘, 정곤, 주(송?)립(?)이가 강희 24년 을축년(1685년)에 만든 기와’라는 뜻이다.
제1대 줄리엥 권(바오로) 주임신부의 부임 이후, 2000년에 이창섭(아오스딩) 신부가 29번째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데, 약 1천여 명의 신자에 반성·갈곡·인담에 3개의 공소를 두고 있으며, 『예수성심』이란 주보를 매주 발간하고 있다.
문산성당은 선교활동에 힘쓰는 한편, 활발한 사회활동도 함께 전개했다. 가장 우선적으로 들 수 있는 사회활동은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을 빼앗긴 이후 “교육만이 나라를 구하는 지름길”이라는 신념하에 제2대 주임신부인 김명제(베드로) 신부가 배명학교(培命學校)를 설립하였다. 교장은 김명제 신부가 맡고, 수업연한은 심상과(尋常科) 4년, 고등과 3년, 학생 수는 150명으로 시작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문산성당 배명강습회를 따로 설립하여, 약 1천 호나 되는 문산에 보통학교 1군데를 제외하고는 조선 사람들의 교육기관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신자나 비신자를 불문하고 문산 소재 빈민의 자제들을 모아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이후 배명강습회는 1931년 10월에 경상남도 도 당국으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1927년에는 집 없고 의탁할 곳이 없는 노인들을 위해 고조원(孤助院)을 세웠고, 이듬해에는 극빈자의 호상(護喪)을 위해 호상계(護喪契)를 만들고, 교육시설로 배명야학회(培命夜學會)도 만들었다. 또한 유치원, 카톨릭 오시(五時) 품꾼회 등을 결성하여 천주교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당시 어려웠던 문산 주민들의 삶을 치유하려는 노력을 계속 진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