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공동체의 역사]

(1) 금산동약(琴山洞約)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후 조선사회는 모든 면에서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특히 주전장이 되었던 경상도의 경우 다른 지역에 비해 더욱 피해가 막심했으며, 진주지역도 두 차례에 걸친 진주성전투로 그 피해가 매우 컸다. 특히 극심한 경제적인 혼란은 당시 조선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그것은 종래의 양반지배제도에 변화가 발생한 것으로, 양반이나 천민이나 모두 같은 천성을 타고난 존재라는 관념의 발생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념이 실생활에서 반영된 것이 임진왜란 이후 조선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한 이른바‘상하합계上下合契’의 출현이 그것이다. 상하합계는 양반이든 상민이든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혹독한 경제난을 이겨내기 위하여 양반과 상민이 힘을 합하여 종전의 사대부 중심의 동계(洞契)와 상민마을의 전통적인 촌계(村契)가 서로 합계(合契)하여 나타난 새로운 협력체의 하나로. 진주지역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1546~1632]이 1616년(광해군 8)에 만든 「금산동약서(琴山洞約序)」가 그것으로, 현재는 서문만 남아 있고 약문(約文)이 없어서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서문을 통해서 당시의 상황을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다.

서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월아미리(月牙彌里)와 대여촌(代如村)이 합쳐진 것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열 집 중 아홉 집이 비었기 때문에 두 마을을 합하여 하나로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여촌은 지금의 가방리의 일부이다. 두 마을이 합하여 하나가 되었다는 내용은 임진왜란 이후의 어려운 사정을 말하는 것으로 상하합계의 출현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옛날에 마땅하지 못한 것은 덮어버리고, 지금에 적합한데도 옛날에 적합하지 아니한 것은 이를 더했고,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는 것은 버리고 모두 좋아하는 것은 취했다…… 주(註)를 달아 그 뜻을 풀이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였다”는 부분은 양반과 상민 사이의 어떤 공통점을 추구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만, 역시 상세한 조문이 없어서 정확한 의미는 알아내기에 한계가 있다. 또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의 4조목과 퇴계동약(退溪洞約)의 규범에 동네의 고례(古例)를 참작해서 새로운 약문을 만들었다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상하합계의 한 모습이다.

성여신의 「금산동약서」는 지금의 가방리가 임진왜란 직후에 어떤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으며, 이를 어떻게 대처해나갔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기는 하지만, 약문의 미비로 동약의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볼 수 없는 것이 아쉬운 점이다.

(2)가방리의 농민운동

1960년대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도시와 농촌간의 빈부 격차가 커지고, 농업의 모순이 심각하게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국에서는 농촌문제에 관심을 가진 농민운동가들이 등장, 카톨릭농민회·기독교농민회 등과 연대하여 준법투쟁 수준의 농민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전까지 중요한 농업지대의 한 군데면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 중의 하나인 진주에서는 1970년대까지 별다른 농민운동이 없었고, 1980년대 초반에서야 금산면 관방마을, 즉 가방리를 중심으로 농민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가방리의 농민운동은 1980년 7월 정현찬씨에 의해 주도된 관방원예작목회의 결성에서 비롯되었다. 가방리에서는 1970년대부터 비닐하우스 농사가 시작되었으나, 농자재의 구입과 판매과정에서 발생하는 상인들의 심한 농간에 관방원예작목회를 결성하여 농자재의 공동구입, 농산물의 공동판매를 추진하여 큰 성과를 거두게 된 것이 가방리 농민운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마산에서 카톨릭농민회의 교육을 받고 온 정현찬씨에 의해 1981년의 벼 이외의 작물에 부과하는 지방세인 ‘을류 농지세’ 인하 투쟁, 전두환정권 때 외국 쌀의 수입으로 추곡 수매가가 동결되고 수매량도 제한되어, 가방리에서도 희망수매량에 비하여 절반 정도의 양만 수매를 허락하자, 카톨릭농민회와 연계 투쟁하여 결국 1984년 1월 29일에 농민들이 원하는 전량을 추가수매를 관철한 ‘수세 현물납부운동’, 1984년 9월 금산면의 120개 농가가 구입한 불량피망종자의 변상을 요구하여 종자 값과 생산비까지 보상받았던 ‘피망고추 피해보상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특히 ‘피망고추 피해보상운동’은 그 이후 전국적으로 불량종자에 대한 피해 보상의 기폭제가 되었고, 아울러 진주지역 농민들 사이에 농민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루어져 농민운동의 확산의 계기가 되었다.

1987년의 6월항쟁은 농민운동에서도 본격적인 대중투쟁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고추 제값 받기, 수세폐지, 의료보험의 개혁, 수입농산물 저지, 농산물 제값 받기 등의 운동이 시작되고, 또한 농민운동 조직원만이 아닌 일반 농민들까지 각종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카톨릭농민회와 같은 종교의 형식을 벗어난 군단위의 자주적인 농민대중조직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여, 결국 1990년 4월 10일 군단위 농민회의 전국연맹체로‘전국농민회총연맹’(이하 전농)이 결성되었다. 진주에서도 1989년 5월의 금산면 농민회를 비롯하여 진양군농민회 준비위원회를 거쳐 1990년 3월 진양군농민회가 결성되었고, 4월에는 경남도연맹이 결성되었다.

이후 전농은 노태우정권의 농어촌발전종합대책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이를 저지하기 위한 전국적 집회와 시위를 전개하고, 경남도연맹도 ‘우루과이라운드 저지 및 농축산물 제값 받기 경남농민대회’를 개최하는 등 진주시와 진양군을 비롯한 경상남도 각 지역 농민들의 시위가 있었다. 이외에 쌀 전량 수매를 위한 경남도연맹의 투쟁, 민자당 일당독재 분해와 민중생존권쟁취 국민연합의 결성, 민자당 해체와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국민대회, 5·18 광주항쟁 계승 및 노태우 정권 퇴진 서부경남 국민대회 등에 참여하면서 농민운동과 함께 민주화 운동도 병행하였다.

진주지역에서는 전농 경남도연맹의 아래에 금산면지회가 형성된 이후 진주농민회가 조직되고, 이어서 각 지역에 지회가 속속 조직되기 시작하여 각 면마다 지회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지회에 따라서는 마을 단위의 분회를 결성하는 경우도 있으니, 금산면지회의 관방분회·용심분회·구암분회·송백분회의 결성이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이다. 또한 진주에는 진주농민회에 참여한 여성농민들을 중심으로 1993년 여성농민회가 따로 구성되어 활약하고 있다.

진주지역 농민운동의 가장 현저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으로는 진주농민회가 운영하는‘우리영농조합법인’을 들 수 있다. 다른 지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운영사례가 있었으나 전부 실패하고 진주지역에서만 성공한 사업이다.

우리영농조합법인은 1994년 4월 11일 창립총회를 열고 법인으로 등록하면서 정식으로 협동조합사업을 시작하였다. 조합에서는 현재 농약·농자재·면세유를 취급하고 있으며, 1997년에는 독자적인 퇴비공장을 세워 퇴비도 판매하고 있다. 금산면에 본점을 두고 각 읍·면 단위로 분소를 두고 있다. 매출도 점차 증가하여 2001년에 매출 100만원을 돌파하였으니, 이는 정확한 품질과 시장보다 싼 값에 농약, 농자재, 면세유, 퇴비 등을 농민들에게 직접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에나제도’(‘에나’란 진주 사투리로 진짜, 정말이란 의미이다)를 두어 제품에 하자가 있을 경우나 시중보다 비쌀 경우 이를 전액 보상하는 제도로, 농민들에게 조합이 신뢰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제도라 할 수 있다.

사업에서 생기는 이익금은 출자 농민들에 대한 출자배당금, 이용고배당, 직원의 임금 등과 각 농민회 운영비 보조 등에 사용된다. 특이한 점은 직원의 임금이 농민들의 하루 일당을 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조합의 직원들이 받는 임금은 평균 100만원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진주농민회의 우리영농조합이 다른 지역과 달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첫째 사업추진주체가 농민을 위한 사업이라는 원칙을 철저히 관철함으로써 농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 둘째 직원으로 참여한 회원들의 헌신성, 셋째 진주지역이 전국적인 비닐하우스 밀집지역으로 협동사업 시장이 상대적으로 크고 밀집되어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진주의 우리영농조합 사업은 전국적인 모델로 자리잡아 전국 각 지역에 협동조합이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고, 전농에서도 진주의 사례를 바탕으로 체계적인 보급을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