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3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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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運動 |
영어음역 | Donghak Undong |
영어의미역 | Donghak Peasant Movement |
이칭/별칭 |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혁명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백태남 |
[정의]
1894년(고종 31)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접주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하여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운동.
[개설]
동학운동 당시 동학군과 일본군과의 대규모 격전이 있었던 곳은 진주 고승당산(高僧堂山)이었다. 고승당산은 해발 185m로, 일명 고시랑산 또는 고성산(高城山)이라 한다. 고승당산은 지표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동남쪽 들판은 덕천강을 경계로 하여 진주시 수곡면과 접하고, 서쪽과 북쪽도 다른 산맥과는 연결되지 않는 천혜의 요새이다. 현재는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대곡리와 북방리에 걸쳐 소재하고 있지만, 동학운동 당시는 진주목 북평면에 속하였다. 때문에 진주의 동학운동을 말할 때 이 산을 ‘진주 고승당산’이라 하고, 진주를 중심으로 하여 서부 경상남도에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진주동학군’이라 부르고 있다.
[역사적배경]
동학혁명은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횡포와 착취에 항거하여 1894년 2월에 발생하여 한때는 관군을 무찌르고 경상도를 비롯한 삼남지방을 휩쓸었으나 결국 중국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실패로 돌아가고 이듬해 4월 전봉준 이하 동학 지도자들이 처형당하면서 종식되었다. 진주 지역에서도 진주 사람 백낙도(白樂道)[일명 白道弘]는 이에 앞서 1892년 전라도 장수군에 있는 유해룡(柳海龍)으로부터 도를 받고 돌아와 진주를 중심으로 동학을 퍼뜨렸으며, 동학운동 때는 지리산 근처 덕산을 근거지로 봉기하였으나 관군에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말았다.
[발단]
전봉준의 동학군이 1894년 2월 고부에서 봉기하여 전라도 지역에서 세를 떨치고 있을 때 진주를 중심으로 한 서부 경상남도에서는 4월에 봉기한 것으로 나타난다. 당시의 부산 주재 일본 총영사가 서울의 대리공사에게 보낸 전문 내용에는 “경상도에 있어서도 충청도와 전라도 양도에 가까운 지역에는 동학당류가 많아 동당의 소굴이라 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경과]
일본군의 침입에 자극받아 동학군은 9월에 재봉기하였는데, 이때 진주에서도 다른 지역과 동시에 봉기하였다. 진주동학군은 9월 2일 산하 73개 면의 책임자에게 격문을 돌리고 1천여 명의 군중대회를 열어 국가의 안위에 대하여 그 방도를 강구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진주동학군은 시내로 쳐들어와 진주성을 점령하였고, 진주병사 민준호(閔俊鎬)는 이에 대처하지 않고 부하들을 이끌고 친히 동학군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자극을 받은 일본군이 진주에 파병하여 공세를 취하자 진주성을 장악했던 동학군은 9월 11일 금오산 아래 대치로 진영을 옮겼다.
이후 일본군은 진주동학군에 대한 무자비한 소탕계획을 세우고, 먼저 진주지역에 대한 공세를 취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각 고을의 동학을 제거하려면 먼저 진주의 동학을 제거해야 하고, 진주의 동학을 제거하려면 먼저 덕산의 동학을 제거해야 한다”고 선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주동학군은 최후의 결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진주를 비롯한 하동·곤양·남해·사천·단성 등지의 동학지도부는 진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총공격하기로 하고 단성으로 집결하였다. 그 상황을 당시 일본군 장교는 “진주부 동쪽의 문산과 집현전 아래, 그리고 단성 등지에서 동학당 4, 5백명이 모여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여 무기를 탈취하려고 하며, 그 세가 화급하다”라고 상부에 보고하고 있다. 당시 진주지역의 동학접주는 손은석(孫殷錫)·박재화(朴在華)·김창규(金昌奎)·백주응(白周應) 등이었는데, 이들은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지세가 좋은 고승당산에 진지를 구축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그곳으로 근거지를 옮겨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마침내 11월 10일 일본군이 총을 발사하며 침입을 개시하자 진주동학군은 고승당산의 석루를 의지하여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일본군의 신예무기의 위력을 당하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결과]
고승당산 전투 후 일본군은 철수하고 진주에는 관군 100명을 두어 수비케 하였다. 이리하여 진주지역은 겉으로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동학군의 봉기는 완전히 진압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고부민란으로부터 1년여에 걸쳐 전개되었던 전국적인 동학농민운동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추세력이 되었고, 그 맥락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진주에서 봉기한 동학군의 ‘왜적토벌’과 ‘항일구국’이라는 우국충정의 이념이 뒤에 있은 의병운동과 3·1운동으로 이어지는 구국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크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