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275 |
---|---|
한자 | 崔彦亮 |
영어음역 | Choe Eonryang |
이칭/별칭 | 명숙당(明叔当)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판도 |
성격 | 선비 |
---|---|
아버지 | 최수만(崔寿万) |
어머니 | 창녕성씨(昌寧成氏) |
아우 | 최언룡(崔彦龍) |
아내 | 진주강씨 |
출신지 |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단목리 관동 |
성별 | 남 |
생년 | 1552년 |
몰년 | 1593년 |
본관 | 삭녕(朔寧) |
자 | 명숙당(明叔当) |
추증 | 호조좌랑 |
제향 | 창렬사(彰烈祠)[경상남도 진주] |
[정의]
조선 전기의 선비.
[가계]
본관은 삭녕(朔寧). 자는 명숙당(明叔堂). 고려 명종 때의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최천로(崔天老)를 시조로 하고, 최유가(崔瑜價)를 중시조로 하는 삭녕최씨 후손이다. 아버지는 참봉 최수만(崔壽萬)이고,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이며, 부인은 진주강씨이다.
[생애]
1554년(명종 9)경 당시 진주목 진성면 대사리에서 태어나 북면 사죽리 단지동으로 이사를 하여 살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이듬해 왜군이 다시 진주성에 침입해 올 때 부인이 왜적에게 욕을 당할까 목을 베어 장례지내고 아들과 함께 의병을 모아 진주성으로 들어가서 왜적에 대항했다. 1593년(계사년)의 진주성전투 막바지인 6월 29일 서문이 무너지면서 왜적이 침입해오자 이를 모두 퇴치하였다. 그러나 적의 정예부대가 북문을 넘어서 다시 돌격하여오자 중과부적으로 방어력을 잃고 최후를 맞게 되었다. 이때 최언량은 남강변의 바위에다 “삭녕인 최언량 여기서 죽다”라고 혈서를 남기고 순절하였다 한다. 그의 아들 최형진(崔衡晉)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이후 참봉으로 증직된 전사자로 오늘에 남아 있다. 『진양속지(晋陽續誌)』권3「충의조(忠義條)」에 이름이 올랐다.
[묘소]
경상남도 진주시 대곡면 유곡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43년(영조 19) 호조좌랑에 추증되었으며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에 있는 창렬사(彰烈祠)에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