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3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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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之瑞 |
영어음역 | Jo Jiseo |
이칭/별칭 | 백부(伯符),지족(知足)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장경준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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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조찬(趙瓚) |
어머니 | 정참(鄭參)의 딸 |
성별 | 남 |
생년 | 1454년(단종 2) |
몰년 | 1504년(연산군 10) |
본관 | 임천(林川) |
자 | 백부(伯符) |
호 | 지족(知足) |
추증 | 도승지 |
제향 | 신당서원(新塘書院)[경상남도 진주] |
대표관직 | 창원부사 |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임천(林川). 자는 백부(伯符), 호는 지족(知足). 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지낸 조찬(趙瓚)이며, 어머니는 생원 정참(鄭參)의 딸이다.
[생애]
1454년(단종 2) 태어나 1474년(성종 5) 생원시에서 1등으로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면서, 권지승문원정자에 제수되었다. 이후 1478년에는 통신사 이계동(李季仝)의 군관(軍官)이 되어 일본에 내왕하였고, 1479년 귀국하여 승문원저작으로 다시 문과중시에 1등으로 급제하고 형조좌랑에 발탁되었다. 이 해 건주위(建州衛) 정벌을 위하여 파견된 서정대장(西征大將) 어유소(魚有沼)의 종사관이 되어 서정에 참가하였으나, 어유소의 전명(傳命)을 잘못한 일로 고신을 몰수당하고 외방에 유배되었다. 그 뒤 1481년 “문학에 뛰어난 인물이니 서용하라”는 성종의 특지에 따라 서반직에 복직된 뒤 성종 대를 통하여 교리·형조정랑·지평·응교와 세자시강원필선·보덕을 역임하였다. 이어 1495년(연산군 1) 창원부사로 파견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지리산에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세자 때 조지서의 풍간(諷諫)함과 집요한 진강(進講)을 혐오하였던 연산군의 미움을 받아 참살되었다.
[학문과 사상]
시문으로 명망이 높았다.『동문선(東文選)』에 「언심견투(彦深見投)」라는 제목의 시 1수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성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1506년(중종 1) 관작이 회복되고 통정대부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되면서 신원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의 신당서원(新塘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