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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2914
한자 鄭士龍
영어음역 Jeong Saryong
이칭/별칭 운경(雲卿),호음(湖陰)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태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성별
생년 1491년(성종 22)연표보기
몰년 1570년(선조 3)연표보기
본관 동래(東萊)
운경(雲卿)
호음(湖陰)
대표관직 판중추(判中樞)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음(湖陰)이다. 부사 정광보(鄭光輔)의 아들이며,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조카이다.

[생애]

1507년(중종 2)에 진사가 되고,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14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고, 1516년 황해도도사로서 문과중시에 장원하였으며 사간을 거쳐 1523년 부제학이 되었다. 1534년 동지사(冬至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42년 예조판서로 승진이 되고, 1544년 공조판서로 다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4년 대제학이 되었으나 1558년 과거의 시험문제를 응시자 신사헌(愼思獻)에게 누설하여 파직되었다. 이 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복직되고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1562년 다시 판중추부사에 전임되었다. 이듬해 사화를 일으켜 사림을 제거하려던 이량(李樑)의 일당이라 하여 삭직당했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의하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중추(判中樞)에 이르렀고 문형(文衡)을 맡았다. 한양에서 의령(宜寧)에 흘러들었다가 뒤에 진주에 옮겨와 살았다.

[저술]

중국에 다녀와서 『조천록(朝天錄)』을 남겼고, 이 외에 『호음잡고』가 있다.

[작품]

관료적인 시인으로 시문·음률에 뛰어났고 글씨에도 능했다. 일찍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을 떨쳤을 뿐만 아니라 여러 번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동안 중국인과 주고받은 시가 많았다. 말을 치밀하게 다듬어 웅걸차고 기이한 문구를 얻으려는 시풍을 장기로 삼았다. 특히, 칠언율시에 능하였으며, 당시 문단에서 그와 신광한(申光漢)을 쌍벽으로 꼽기도 하였다. 글씨로는 광주(廣州)에 이둔촌집비(李遁村集碑)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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