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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402912
한자 鄭苯
영어음역 Jeong Bun
이칭/별칭 자유(子),애일당(愛日堂),충장(忠莊)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남도 진주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태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신
아버지 정이오(鄭以吾)
성별
본관 진양(晋陽)
자유
애일당(愛日堂)
제향 충렬사(忠烈祠)[전라남도 장흥]|장릉(莊陵) 충신단
대표관직 우의정

[정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진양. 자는 자유(子), 호는 애일당(愛日堂). 할아버지는 정신중(鄭臣重)이고, 문정공(文定公) 정이오(鄭以吾)의 아들이다.

[생애]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경승부승(敬丞府丞)에 이르렀고,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이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22(세종 4)년부터 1438년까지 사간원헌납, 함길도경차관, 승정원좌·우승지, 충청도감사, 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3년에는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 김종서(金宗瑞)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주도한 계유정난으로, 문종의 유명(遺命)을 받아 단종을 보필하던 황보인(皇甫仁)·김종서 등이 주살되자 낙안(樂安)에 안치되었다. 곧 고신(告身)을 추탈당한 뒤 낙안의 관노가 되었다.

정분이 낙안에 안치된 사건과 관련하여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정분이 마침 영남으로부터 돌아오고 있을 때 용안역(用安驛) 앞에 이르러 경관(京官)이 역마(驛馬)로 달려오는 것을 노상에서 만나 전지(傳旨: 임금의 전서)가 있다고 큰소리로 외치는 말을 들었다. 정분은 말에서 내려 재배(再拜)하고 경관에게 말하기를 "길 복판에서 형을 받는 것은 좋지 못하니 역관(驛館)으로 나아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라 하니 경관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전지를 받으시면 적소(謫所: 귀양살이 하는 곳)로 모시고서 돌아갈 뿐입니다"하였다.

이에 정분은 또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나를 살리는 것이냐?"라 하고 말에 올라 관원과 같이 함께 갔다. 관원은 미리 정분의 낭리(朗吏: 부하 직원)였음을 말하였으나, 정분은 반드시 조정의 일을 물으면 응답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알고 낙안군(樂安郡)[지금의 전라도 光陽]에 이르기까지 십여 일 동안 아침저녁으로 함께 있으면서 한번도 입을 열어서 묻지 아니하였고 적소에 이르러서는 노고를 치하하고 헤어졌을 뿐이었다.

정분은 적소에서 1년 여간 목숨을 보존하다가 1454년(단종 2) 사사(賜死)되었다. 성격이 침착하면서도 기국(器局)이 있었다. 문신이지만 토목에 조예가 깊어, 세종 말에서 단종 초에 걸쳐 궁궐 조성·축성, 현릉(顯陵: 문종의 능) 조성 등에 공헌이 있었다.

[상훈과 추모]

1746년(영조 22) 김종서·황보 인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1786년(정조 10) 장흥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고, 1791년 장릉(莊陵) 충신단에 배식(配食)되었다.

1804년(순조 4) 충신을 표창하기 위해 집 앞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1808년 신창(新昌) 진사 이기선(李基善) 등의 상소로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08 2011년 한자(문) 재검토 작업 1) 현릉(顯陵: 문종 묘) 조성 등에 공헌이 있었다. ->현릉(顯陵: 문종의 능) 조성 등에 공헌이 있었다. 현릉(顯陵: 문종 묘)은 지명 태깅 처리 함 2) 1808년 신창(新昌) 진사 이기선(李基善) 등의 상소로 -> 신창(新昌)은 지명 태깅 처리 함 3)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逝之典)을 받았다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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