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8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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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俊民 |
영어음역 | Yi Junmin |
이칭/별칭 | 자수(子修),신암(新菴),효익(孝翼)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덕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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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이공량(李公亮) |
성별 | 남 |
생년 | 1524년 |
몰년 | 1590년 |
본관 | 전의(全義) |
자 | 자수(子修) |
호 | 신암(新菴) |
시호 | 효익(孝翼) |
제향 | 임천서원(臨川書院)[경상남도 진주] |
대표관직 | 좌승지|병조판서|의정부좌참찬 |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菴). 참봉을 지낸 이공량(李公亮)의 아들이며, 영남의 대학자인 조식(曺植)은 그의 외숙이다.
[생애]
1524년(중종 19)에 태어나 1549년(명종 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제수되었다. 1554년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이후 홍문관수찬사헌부지평 등 청요직에 있으면서 당시의 권신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가 반대파의 미움을 사서 영월군수로 좌천되었다. 1561년 강릉대도호부사가 되었으나, 관할구역인 대창역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변고가 일어나 책임을 지고 면직되었다. 그 뒤 세자시강원문학으로서 세자교육에 힘썼으며, 강계부사를 지냈다. 선조가 즉위하자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좌승지를 역임하고, 이후 경기도관찰사, 공조참판을 지냈다. 1570년(선조 3)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오랫동안 국방을 담당하였으며, 1575년 평안도관찰사로 나아가 북변을 잘 다스려 공을 세웠다. 이즈음 동인·서인의 붕당이 심해지자 이를 매우 염려하였고, 당론을 조정하려던 이이(李珥)를 존경하여 그를 따랐다. 1584년 이이가 죽은 후 당인들이 그를 탄핵, 공격하자 이에 맞서 강경하게 그 불가함을 주장하는 의기를 보였다. 내직으로 병조판서, 지의금부사, 의정부좌참찬을 두루 역임하였다. 천품이 강직하여 사리에 맞지 않으면 승복하지 않았다. 평소에 항상 검소하였으며 자제 교육에도 매우 엄하였다. 1590년(선조 23) 별세하였다.
[학문과 사상]
당시의 공허한 사장(詞章) 중심의 문풍을 경계하고, 경학에 충실하여 덕행을 장려할 것을 주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효익(孝翼)이며, 경상남도 진주의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진양지(晋陽誌)』권3「인물조(人物條)」에 이름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