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817 |
---|---|
한자 | 成鑮 |
영어음역 | Seongbak |
이칭/별칭 | 이선(而善),흡여(翕如),매죽헌(梅竹軒)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임경희 |
성격 | 선비|효자 |
---|---|
아버지 | 성여신(成汝信) |
성별 | 남 |
생년 | 1571년 |
본관 | 창녕(昌寧) |
자 | 이선(而善)|흡여(翕如) |
호 | 매죽헌(梅竹軒) |
대표관직 | 진사 |
[정의]
조선 전기의 선비, 효자.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字)는 이선(而善)·흡여(翕如), 호는 매죽헌(梅竹軒). 아버지는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이다.
[생애]
1571년(선조 4)에 성여신의 장남으로 태어나 진주 대여촌에 살았다. 어릴 때부터 재주가 뛰어나 모촌(茅村) 이정(李瀞)[1541~1613]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아버지와 스승은 모두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들이다. 노파(蘆坡) 이흘(李屹)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흘은 합천 지역의 선비로 역시 남명의 제자이다.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 간송당(澗松堂) 조임도(趙任道)[1585~1664], 임곡(林谷) 임진부(林眞怤)[1586~1658]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기품이 맑고 수려하였으며, 효성스러웠다. 집안이 가난한데도 어버이를 봉양하는데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다 드리고, 항상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친구를 대접하는 데에는 반드시 신의로써 하고, 의로운 것이 아니면 작은 것이라도 남의 것을 취하지 않았다.
죽은 뒤에 능허(凌虛) 박민(朴敏)[1566~1630]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는데, “집안이 대대로 넉넉하고 향기로워 길사(吉士)의 고풍이 깃들었네. 마음은 인서(仁恕)로 정하고, 몸을 고요하고 크게 처신하였네. 효제(孝悌)만을 생각하니 불록(茀錄)의 기틀이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