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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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時敏 |
영어음역 | Kim Simin |
이칭/별칭 | 면오(勉吾),충무(忠武),상락군(上洛君),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수덕 |
성격 | 무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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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김충갑(金忠甲) |
출신지 | 목천(木川) |
성별 | 남 |
생년 | 1554년 |
몰년 | 1592년 |
본관 | 안동(安東) |
자 | 면오(勉吾) |
시호 | 충무(忠武) |
추증 | 영의정|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
제향 | 충민사(忠愍祠)[경상남도 진주시]|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경상남도 진주시] |
대표관직 | 진주목사 |
[정의]
조선 중기의 무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목천(木川) 출생으로 아버지는 지평 김충갑(金忠甲)이다.
[생애]
1578년(선조 11)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에 입사하였으며, 1581년에는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 뒤 훈련원판관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에 피하였다가 목사가 병사하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여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었다. 그 공로가 인정되어 진주목사가 되었으며, 계속해서 사천(泗川), 고성(固城), 진해(鎭海)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였고,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올라 김산(金山)에서 다시 한 번 적을 격파하였다. 1592년 10월 진주성(晋州城) 전투에서 이마에 적탄을 맞고 전사하였다.
[활동사항]
진주판관으로 있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성민을 안무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하였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으며, 성을 지키기 위하여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체제를 갖추었다.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진해·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하여 적을 격파하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 요청에 호응하여 정병 1천여 명을 이끌고 거창의 사랑암(沙郞巖)에서 김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다.
1592년 8월 진주목사로 취임하여서는 적군의 제조방식을 모방하여 염초(焰硝) 5백여 근을 만들었으며, 총통(銃筒) 70여 병(柄)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하여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592년 10월 5일 왜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하였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중에 영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하게 하여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고 적과의 싸움에 대처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치다 이마에 적탄을 맞고 순절하였다. 죽은 뒤 성중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하였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묘소]
현재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었으며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고, 뒤에 영의정,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증(追贈)되었다. 경상남도 진주시의 충민사(忠愍祠), 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배향(配享)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