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20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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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晋州農工銀行 |
영어의미역 | Jinju Agricuture and Industry Bank |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이수진 |
[정의]
개항기 경상남도 진주지역에 있었던 금융기관.
[개설]
당시 진주지역에는 은행다운 은행이 없었던 관계로 고리대금업이 성행해 한 달에 보통 5~6푼의 높은 이자를 주지 않고는 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릴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근대식 금융기관인 진주농공은행의 출현은 다양한 금융시책과 신용성 확보로 진주 지역민들의 대출욕구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설립목적]
농·공업의 개량·발달을 위해 1906년 7월에 설립되었다.
[설립경위]
1906년 3월 공포된 농공은행 설치조례에 따라 그해 7월 한성·평양·대구 등 전국에 설립된 8개 은행 중의 하나로 출발했다. 당시 진주농공은행은 자본금 10만원으로 창설됐는데, 정부 출자 이외에 일반인들로부터 1주에 50원 하는 주식을 공모했으나, 진주 지역민들에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진주농공은행 창립위원인 일본인 ‘다니구치[곡구]’ 경상남도청 재무고문관이 진주군청의 민병성 군수를 설득하여 창립하였다. 진주농공은행이 처음 위치했던 영업장소는 진주성 안 세무서 거리의 남강 벼랑 위였으며, 초대 은행장으로 김기제가 취임하였으나, 실무는 일본인 감리관 ‘요네야마’가 담당하였다.
[변천]
1908년 8월 당시 대한제국 정부 명령에 따라 진주농공은행이 대구농공은행과 합병하여 주식회사 경상농공은행으로 바뀌면서, 대구에 본점이 설치되자 진주농공은행은 경상농공은행 진주지점이 되었다. 1910년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지금의 동성동 부근인 진주성 밖으로 영업장소를 옮겼다. 1914년 5월에는 새로 공포된 총독부의 법령에 의해 국고뿐만 아니라 진주성에 있던 경남도금고 사무까지 취급하는 독점적 금융기관으로 발전하였으나, 1918년 10월에 총독부의 합병방침으로 전국의 모든 농공은행이 해체되자 경상농공은행 진주지점도 해체되었다.
[주요사업과 업무]
연부(年賦) 또는 정기 상환의 방법에 의한 부동산 담보 대출, 공공단체에 대한 무담보 대출, 농공업자 20명 이상의 무담보 연대대출 등을 하였다.
[활동사항]
진주지역의 양반과 지주, 상공인들을 대상으로 부동산 등을 담보하고 대출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계산도 미숙하고 근대적 금융기관 이용방법도 서투른 중소 지주들과 농민들이 담보물이나 토지를 빼앗기는 사례가 허다했다.
또한 농업자금의 대부, 창고업, 위탁판매 및 공동구입 등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기평(技平)도 두어 농사 지도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엽전 회수 등 보조화(補助貨)의 보급에도 힘썼다.
[조직]
은행장 김기청(金琪淸), 이사 서진욱(徐珍旭), 김병대(金炳臺), 안정기(安正基), 정재시(鄭在時) 외에 감사 2명의 중역을 선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