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9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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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台範 |
영어음역 | Jeong Taebeom |
이칭/별칭 | 玉田範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중안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형목 |
성격 | 친일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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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남도 진주시 중안동 |
성별 | 남 |
대표경력 | 경남도청이전방지동맹회 상경진정위원|진주금융조합장|김삼철도기성회 고문|진주미곡통제조합 부조합장 |
[정의]
일제강점기 진주지역을 대표하는 지주·금융가이자 친일파.
[생애]
경상남도 진주군 중안동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1909년 중안3동에서 전당포를 경영하는 부호이자 금융업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빈민구휼과 육영사업을 지원하는 등 주민들로부터 중망을 받았다.
본격적인 사회활동은 1920년을 전후로 이루어졌다. 1920년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 발기인과 경남도청 이전방지 동맹회 상경진정위원, 1923년 제2대 진주면협의회원, 1924년 진주번영회장과 경남도청 이전반대 도지사 면담위원, 1927년 진주군 지주간담회 대표, 1933년 진주국방의회 부회장, 1935년 서봉정 교풍회 회두, 1937년 애국비행기 진주호 헌납회 회원, 1938년 진주미곡통제조합 부조합장, 1938년 일신교육재단 평의원, 1939년 조선특별지원병 진주후원회 고문, 1939년 진주기생조합 취체역과 진주부회 의원선거 입회인, 1940년 김삼철도기성회 고문과 진주금융조합장 등을 역임하였다.
[활동사항]
정태범은 육영일신재단 평의원과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 발기인으로서 교육운동에 대한 후원 등 문화계몽운동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활동과는 달리 1938년 5월 사립 봉산고등여학교를 내선공학 취지에 따라 경상남도에 기부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진주지역 민족교육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본격적인 친일활동은 1920년 11월 초대 진주면협의회 의원선거 출마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1927년 10월 진주군 지주간담회 대표로 참석하여, 소작인이 5년 이상 과실이 없을 때에만 소작기간 연장을 결의하는 등 식민농정에 깊이 간여하였다. 1930년대 진주군 소작위원으로 활동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1933년 진주국방회 창립 시 부회장을 맡은 이래 각종 국방헌금과 중일전쟁 발발 이후 진주 유지들로 구성된 애국비행기 진주호 헌납회에 가입하여 1,500원을 기부하였다. 이듬해 2월 ‘진주군민의 애국결정체’라는 이른바 ‘애국 제214호 연락기’를 일제에 헌납하는 데 앞장섰다.
1940년에는 『매일신보』에 ‘축 황기 2600년 신춘’ 광고를 게재하는 등 일제의 중국 침략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다년간 진주군 미곡통제 부조합장도 이와 같은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각종 기념일 때마다 신문광고를 반복하는 등 민족말살정책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기원절 등 신사제전 때마다 참례는 물론 신사 경상비도 부담하는 등 일제의 침략전쟁 후원과 선전활동에 노력하였다.
[의의와 평가]
정태범은 일제강점기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문화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한편, 1920년을 기점으로 일제 식민정책을 옹호하는 관변단체 임원직도 두루 역임하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다. 소작조건을 강화하는 지주대표로서의 활동이나 진주권번 취체역으로 재직한 활동에서 민중을 억압·탄압하는 데 일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적대적인 입장은 일선동조론에 입각한 민족말살정책 동참자로서 불행을 자초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