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4017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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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學贊 |
영어음역 | Yi Hakcha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진주시 대안동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형목 |
성격 | 사회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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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남도 진주시 |
성별 | 남 |
대표경력 | 형평사 집행위원 |
[정의]
일제강점기 백정의 신분해방을 주도한 사회운동가.
[학력]
백정들은 일반인과 격리된 관계로 사실상 공교육을 받을 기회조차도 없었다. 다만 재산을 상당히 축적한 부호로서 사숙·의숙에서 수학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전문(傳聞)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도수업·수육판매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부호로서 잘 알려져 있다.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 중 하나로, 이학찬의 자제의 공립보통학교 입학거부를 언급하는 부분하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
[활동사항]
1920년대 초반 문화운동 확산과 더불어 개조(改造)는 사회적인 ‘화두’로서 부각되었다. 진주지역도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인권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학찬은 사회운동가들과 더불어 백정의 신분해방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이는 1923년 4월 형평사 창립으로 귀결되었다. 자선사업 등을 통하여 백정공동체 내에서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던 이학찬은 진주지역 일대에 산재한 백정 마을을 방문하여 적극적인 동참과 지원을 호소하였다.
이학찬은 1923년 4월 24일 경상남도 진주군 대안동 진주청년회관에서 강상호·신현수·장지필 등과 형평사 발기와 다음날 발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월 13일 형평사창립축하식도 진주좌(현 진주극장)에서 개최하는 등 사원들 단결과 자긍심 고취에 노력하였다. 창립축하식에는 선전지 7,000여 매를 배포하는 한편 대대적인 시가행진을 병행하였다.
8월에는 본사 건물에 야학 개설을 주도하였다. 교과목은 한글 읽기와 쓰기, 일반상식, 윤리, 기초적인 한자 등으로 일시에 100여 명이나 호응하는 등 대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본사 중앙집행위원으로서 사원 복지향상과 인권 옹호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1923년 11월 대전대회와 1924년 2월 부산대회를 계기로 형평사가 내분에 휩싸이자 이학찬은 진주파(보수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학찬은 형평운동을 공동체 운동보다 인권운동으로서 인식하였다. 1926년 이후 본사 서울 이전과 혁신파의 주도권 장악과 더불어 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3·1운동 이후 진주지역에는 50여 개에 달하는 각종 사회단체가 운영되고 있었다. 각 단체의 활동영역은 다양하였으나 궁극적인 지향점은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개혁에 있었다. 형평사 조직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학찬은 형평사 창립 발기인이자 중앙집행위원으로서 백정의 신분해방 등 인권운동에 기여한 바가 크다.